[문화의 창] 진실은 묻힐수록 자란다

입력 2024-05-10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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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남 영화평론가ㆍ계명대 교수

<‘장교와 스파이’, 로만 폴란스키 감독, 2019년作>

보불전쟁(1870년 7월 19일~1871년 1월 28일)에서 패배한 프랑스는 왕정(나폴레옹 3세)을 포기하고 제3공화국을 출범시켰다. 승전한 프로이센은 철혈재상 오토 폰 비스마르크 주도하에 독일제국(빌헬름 1세) 통일의 위업을 달성했다. 프랑스 제3공화국 위정자들은 패전의 원인을 규명하고 해결책을 찾으라는 비등한 여론에 밀려 희생양을 내부의 적에서 찾고자 했다.

군부의 모든 장교에 대한 신원조사와 사상 검증을 끈질기게 진행했다. 더불어 나날이 강성해지는 독일제국의 위협을 피부로 느끼며 군비증강에 열을 올리는 한편 치열한 첩보전을 이어갔다. 그 와중에 ‘드레퓌스 사건’이 발생했고, 12년 넘는 기간 동안 지속되며 당시 세계 최고의 문명국가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던 프랑스를 질풍노도의 광기에 휩싸이게 했다.

1894년 9월, 프랑스 육군 참모본부 정보국은 프랑스 주재 독일 대사관의 우편함에서 익명의 발신인이 보낸 편지를 입수했다. 수취인은 독일 대사관의 무관 슈바르츠코펜 대령이었고 프랑스 육군의 기밀에 해당하는 문건이 들어 있었다. 조사에 나선 군 정보국은 유대인 혈통의 알프레드 드레퓌스 대위를 지목해 스파이 혐의(국가반역죄)로 군사재판에 기소했다. 그해 12월 22일 종신형 선고, 이듬해 2월 악마섬에 유배되며 사건은 그대로 묻혀버리는 듯했다.

2년 후(1896년), 참모본부 정보국에 새로 부임한 피카르 중령이 문건을 열람하게 되면서 반전이 일어났다. 피카르는 촉망받던 드레퓌스가 어쩌다가 반역자가 됐는가에 의문을 품고 자체 조사에 나섰다. 그는 드레퓌스를 스파이로 지목할 근거가 전혀 없는 것은 물론, 정작 진범은 정보국 방첩대 실무 책임자인 에스테라지 소령이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피카르는 즉각 참모본부의 직속 상관인 공스 장군에게 보고하고 재심을 요구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오히려 군의 명예가 실추되고 수뇌부가 책임을 물게 될 것을 우려해 피카르를 알제리로 좌천시켰다가 군사기밀누설죄를 적용해 체포했다.

그러나 진실을 파헤쳐 드레퓌스의 무고함과 국가권력의 무도함을 밝히려는 암중모색은 점점 큰 동력을 얻게 됐다. 1897년부터 프랑스는 ‘재심 반대파(절대다수의 보수진영)’와 소수의 ‘재심 요구파’로 갈리면서 내전을 방불케 하는 엄청난 논쟁이 벌어졌다. 재심 반대파 주장의 요지는 ‘군은 국가의 생명이며 절대 무오류의 조직’이라는 것, 그리고 실체적 진실이 무엇이든 ‘국가안보를 최우선으로 하는 군의 위신을 존중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에 충격을 받은 대문호 에밀 졸라가 양심적인 지식인과 법률가들, 공화주의자와 일부 진보적인 정치인들, 소수의 신문이 포함돼있던 재심 요구파에 합류하며 행동에 나섰다. 졸라는 1898년 1월 13일, 로로르(L’Aurore) 신문에 “J’accuse…!(나는 고발한다)”라는 제목으로 대통령 펠릭스 포르에게 보내는 공개서한을 실었다.

졸라는 이 글에서 오만한 국가권력이 국익라는 이름으로 오늘, 드레퓌스 대위의 명예와 인격과 생명을 짓밟고 땅에 묻어버렸지만, 이것을 용인하고 눈감으면 더욱 대담해진 국가권력은 내일, 우리 중 누구에게라도 똑같이 행하게 될 것이라고 하는 점에 대해 지적했다. 한마디로 “진실이 땅에 묻히면 자라난다. 그리고 무서운 폭발력을 축적한다”는 것이 이글의 핵심이었다. 그러나 그로부터도 8년 넘게 나라 전체를 광기에 휩싸이게 했던 이 사건은 1906년 최고재판소가 드레퓌스에게 무죄를 선고하면서 종결됐다.

이 사건을 영화화 한 ‘장교와 스파이’(프랑스어 원제는 , 로만 폴란스키 감독)는 프랑스의 여러 프로덕션이 연합해 제작돼 2019년 제76회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심사위원대상을 수상했다. 우리나라에서는 코로나19 영향으로 극장개봉 없이 곧장 OTT로 스트리밍됐다. ‘채수근 상병 특검법’의 국회 통과를 보면서, 본질을 호도하고 진실을 자꾸 땅에 묻으려 하는 자들에게 영화의 관람을 권한다. 더불어 이 사건의 역사적 맥락과 본질을 제대로 공부하며 이제라도 교훈을 얻으라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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