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수희 서울남부지방법원 부장판사 칼럼
“이혼과 재산분할, 친권자 및 양육자, 양육비, 면접교섭에 관해 모든 합의가 원만히 끝났으니 신속히 조정기일을 지정해 주시기 바랍니다.”
조정전치주의가 적용되는 이혼 사건에서 공들여 권유해도 조정이 안 되는 경우가 허다한데 당사자들이 스스로 조정을 하겠다니 반가운 마음에 빠른 날짜로 조정기일을 열었습니다.
중학교 2학년 아들 서훈이를 두고 남편을 상대로 이혼소송을 낸 창숙씨의 소장에서는 사실 뚜렷한 귀책사유를 찾기는 어려운 이유로 이혼을 원하고 있었어요. ‘대화가 전혀 안 됩니다’, ‘고집이 세고 이해심이 전혀 없습니다’, ‘모든 것을 자기 마음대로만 합니다’, ‘뒤늦게 얻은 서훈이 때문에라도 참고 살려고 부단히 애썼지만 도저히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습니다’와 같은 문장들 끝에 창숙씨는 혼인관계 파탄을 들어 이혼을 구하고 있었습니다.
반면 남편 정근씨의 답변서에서는 ‘이혼을 원하지 않습니다’, ‘아직도 아내를 사랑합니다’, ‘제가 좀 더 노력을 하겠습니다’, ‘우리 혼인은 아직 파탄되지 않았고 저는 절대 이혼할 수 없습니다’라고 하면서 창숙씨의 이혼 청구를 기각해 줄 것을 청하고 있었지요.
이와 같이 민법 제840조 제6호 ‘기타 혼인을 계속하기 어려운 중대한 사유’로서 혼인관계 파탄을 이혼 사유로 주장하는 경우, 부부관계의 기초가 되어야 하는 애정과 신뢰가 상실되어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혼인관계가 파탄되었는지 여부를 심리하게 되는데요. 창숙씨의 주장은 뚜렷한 이혼 사유를 알기 어려운 반면, 아내를 사랑하고 자신이 더욱 노력하겠다는 정근씨의 답변 자체가 어찌 보면 혼인관계의 파탄이 아직은 아니라고 볼 근거가 될 수 있어서, 판단이 쉽지 않은 사건이었죠.
그런데 두 분이 합의를 하고 조정기일을 지정해 달라하니 ‘판단에 대한 부담’을 다소 내려놓고 조정기일에 창숙씨와 정근씨를 만났습니다.
합의해 온 내용을 보니, 이혼하되, 위자료는 서로 안 주고 안 받기, 재산분할은 현재 정근씨 명의로 되어 있는 아파트를 담보로 대출을 받아서 창숙씨에게 오피스텔을 얻어 주기로, 즉 오피스텔 전세금 정도의 금액을 정근씨가 창숙씨에게 주기로 했더군요. 그리고 중2 아들 서훈이의 친권자 및 양육자는 정근씨로 하고, 원래 살던 아파트에서 정근씨와 서훈이가 그대로 살면서, 창숙씨가 서훈이와 한 달에 2회씩 주말에 면접교섭을 하기로 했고, 창숙씨가 현재는 직장이 없지만 직장을 구하는 시간을 둬서 6개월 정도 이후부터 월 50만 원씩 서훈이의 양육비를 정근씨에게 지급하기로 되어 있었어요.
언뜻 보기에는 전체적으로 무난한 합의 내용이어서 얼른 조정을 해 드리려고 그 내용을 하나씩 확인하며 조항으로 정리해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웬걸요, 간단한 조항 하나 정리하는 데에도 생각지 않게 시간이 너무 걸렸어요. 창숙씨는 입을 꼭 다물고 간단히 예, 아니오 외에는 거의 말을 하지 않았지만, 주로 말을 많이 했던 정근씨와의 대화가 참 쉽지 않았습니다.
우선은 간단한 질문에도 동문서답을 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예컨대 위자료를 서로 청구하지 않기로 한 것이 맞느냐는 질문에 ‘자기는 잘못한 것이 하나도 없다’는 말만 반복하는 식이었어요. 그러면 질문의 의미를 분명히 전달하기 위해 다시 명확히 질문을 하거나 질문에 대한 설명을 하게 되는데, 정근씨는 그 도중에 끼어들어 말을 하거나 되묻기도 했어요. 그러한 말들은 여전히 동문서답이거나 혹은 전혀 상관없는 내용들이기도 했어요. 예컨대 아파트 담보 대출은 언제쯤 받을 수 있는 것으로 예상하는지를 재산분할금 지급 기한을 정하기 위해 묻고 있는 데 대하여 ‘재산이 아파트 하나뿐이라 대출을 받아야 돈을 주지, 대출 못 받으면 돈을 줄 수 없다’는 말을 반복하는 식이었죠.
시간만 자꾸 흘러가자, 옆에서 창숙씨는 답답해 하면서 한숨을 쉬었습니다. “이렇게 대화가 안 된다니까요. 자기 말만 해요.” 사실 소장만 봐서는 창숙씨가 주장하는 이혼 사유가 잘 이해되지 않았지만 이제 정근씨와 한 30분만 말을 섞어 보니 아하! 하고 창숙씨 말이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있었습니다.
정근씨는 상대방이 무슨 말을 하든 자기가 하고 싶은 말만 반복하는 패턴으로 말하는 사람이었고 자신의 의견을 고집스럽게 고수하는 경향이 있더군요. 거기에 사고의 흐름도 폐쇄성이 강해서, 결국 상대방으로서는 정근씨에게 무엇을 전달하고자 해도 막히기 일쑤고 그 결과 정근씨 역시 인지나 의사 결정에서 자기중심성을 벗어나기 쉽지 않겠다 싶었습니다. 그날 정근씨가 했던 말들을 이어 이해해 보면, 판사가 이혼 조정조항을 정리하기 위해 무엇을 묻든 무엇을 말하든, ‘나는 잘못이 없는데 왜 이혼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이혼은 해 주지만 다른 것은 해 주기 싫다’라는 취지의 말을 반복해서 토로하고 있었던 듯합니다.
그런 정근씨를 창숙씨가 겨우 설득해서 이혼을 하기로 하고 데리고 나온 것이었죠. 그러니 말이 재산분할금으로 오피스텔 전세금을 해준다는 것이지, 원하는 조건의 대출이 안 되면 재산분할금을 안 주겠다는 것이 진의였고, 서훈이의 친권자, 양육자, 양육비 등 양육사항도 창숙씨의 의견과 달리 정근씨가 원하는 대로 마지못해 합의해서 나온 상태였습니다. 조정조항 정리에 진척이 없이 시간만 가자, 창숙씨는 그냥 이혼만 해주면 나머지는 아무래도 좋다는 식이 되었어요. “판사님, 이렇게 20년 이상 살았어요. 제발 빨리 이혼만 좀 시켜 주세요.”
그날 창숙씨는 이혼을 할 수 있었을까요. 안타깝게도 창숙씨는 아직은 답답한 채로 집에 돌아가야 했습니다. 다른 사항들은 차치하고 자녀의 양육사항은 정근씨 원하는 대로, 물론 창숙씨는 무조건 다 동의하겠다고 말했지만, 그렇게 정해질 수 없는 것이니까요. 민법 제837조, 제843조에 의하면, 이혼하려는 부모는 자녀의 양육사항을 자녀의 복리에 부합하게 정하도록 협의해야 하고 법원은 그 협의가 자녀의 복리에 부합하는지 심사할 의무가 있으므로, 정근씨 마음대로 정하거나 창숙씨가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무조건 그에 동의하거나 해서 정하는 것은 말 그대로 ‘위법한’ 것이죠.
중2 서훈이에 대한 양육사항, 즉 친권자 및 양육자, 양육비, 면접교섭을 적법하게 정하기 위해서는 결국 아동 상담위원에게 서훈이를 보내서 심리적 조정조치(調整措置)를 하는 과정에서 서훈이의 복리에 부합하는 내용을 확인하도록 하였습니다.
“아니 내가 친권자인데 뭘 더 확인하겠다는 겁니까. 부모가 합의를 했다는데 왜 법원이 관여를 합니까.” 이렇게 반복적으로 항의하는 정근씨에게 위 민법 조항과 양육사항 결정을 위한 가사소송법에 따른 절차를 설명하는 것은 꽤나 애를 먹었지만 그렇다고 ‘서훈이의 복리’를 타협이나 포기할 순 없었으니까요.
서훈이에 대한 상담은 청소년상담 경험이 많은 아동 상담위원에게 맡겨졌는데요. 첫 회기에 서훈이는 비교적 밝고 씩씩한 모습으로 와서 상담을 잘 하고 갔다고 했어요. 부모님이 이혼할 예정임을 잘 알고 있었고 기특하게도 잘 수용하고 있었다고 했습니다. 자신은 아빠랑 살 것이고 엄마와는 가끔 잘 만나겠다고 했으며 현재 공부도 열심히 하고 있다면서 컴퓨터 쪽으로 진학하려 한다는 장래희망도 적극적으로 밝혔다고 했습니다. 그나마 정말 다행이다 싶었습니다.
그러한 상태로 별다른 특이사항 없이 서훈이의 상담 회기가 이어졌는데요. 상담위원이 보고하기를, 6회기 정도 상담을 이어 가면서 양육사항을 살펴보았는데 워낙 서훈이가 부모의 이혼에 잘 적응하고 있고 아빠와 살겠다는 의사가 분명하다, 엄마와의 면접교섭도 원활히 될 것 같다, 스스로 학업이나 학교생활도 성실히 하고 있으니 특별히 걱정할 것을 없어 보여서 다음 7회기에 상담을 종결하고자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마지막 7회기를 마친 날, 상담위원으로부터 다급히 연락이 왔습니다. “판사님, 서훈이 양육사항을 바꿔야 할 것 같아요. 서훈이는 아직은 엄마가 데리고 있어야 할 것 같아요. 그리고 한, 두 번 상담을 더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덩치 큰 중학교 2학년생으로 자기 의견을 또렷이 잘 말하던 서훈이가 이제 상담선생님과 마지막 상담 시간이 되고 보니, 갑자기 눈물이 터져서 펑펑 울더랍니다. 그러면서 사실은 엄마 아빠가 이혼하는 것이 너무 슬프고 자기는 엄마와 떨어져 살기 싫다고 하더랍니다. 그러면 왜 그동안 아빠와 살겠다고 했냐 물으니까, 엄마가 이혼하겠다고 하는데 자기까지 아빠를 두고 엄마랑 나가겠다고 차마 말할 수가 없었다고 울면서 말하더랍니다. 서훈이는 씩씩해 보였지만 마음이 여리고 섬세한 아이였고 엄마를 아직은 너무 좋아해서 헤어지기 싫었지만 한편으론 사랑하는 아빠도 내버려둘 수 없었던 거죠.
사실, 관계 평가 결과가 엄마 쪽이 훨씬 좋았으며 아이를 돌보고 의사소통하고 그 외 모든 면에서 엄마 쪽의 양육능력이 훨씬 나았는데, 그동안 워낙 분명히 서훈이가 아빠와 살겠다고 하니 그러한 의사를 존중하는 방향으로 양육사항을 살펴보고 있었던 것이었을 뿐, 상담 과정에서 결국 아이의 속마음이 드러나고 또 아이에게 필요한 것들이 발견되니 종전 방향을 유지할 수는 없게 되었지요.
그 후 필요한 몇 회기의 상담을 거쳐, 서훈이가 중학교 2학년생으로 어른 키만큼 컸지만 아직은 엄마의 보살핌이 필요한 아이였고 아빠 보다는 엄마와의 관계가 더 양호했으며 특히 의사소통 능력과 아이에 대한 이해 및 수용의 측면에서 엄마 쪽이 훨씬 낫다는 점이 확인되었어요. 반면 아빠 쪽은 서훈이와 의사소통 문제도 있었지만 특히 좋지 않은 것은 정근씨가 아내와 소통이 안 되며 힘든 것이나 부부간 이혼 문제를 아들인 서훈이를 붙잡아 앉혀 놓고 하소연하거나 서훈이를 통해 창숙씨를 조종하려 하는 등(예컨대, “네가 엄마한테 아빠랑 이혼하지 말라고 말해라”)으로 인해 서훈이가 정서적으로 심한 스트레스 상태로 몰린 점 등이 드러났고요.
그와 같은 상황에서 서훈이는 오히려 엄마 대신 아빠의 아내 역할을 떠맡게 되거나, 자녀인 서훈이가 오히려 정근씨의 부모처럼 정근씨를 심리적으로 돌보는 관계를 맺게 되면서 아빠와 같이 살겠다고 했던 것이죠. 그렇게 철이 일찍 든 서훈이의 복리를 위해서는 친권자 및 양육자를 엄마로 하고, 아빠와의 관계는 재조정할 필요가 있었으며 아빠가 양육비를 지급하고 면접교섭을 자주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결과가 나왔어요. 그러려면 재산분할도 재협의를 해서 엄마 쪽에 적어도 방 2개 이상의 주거를 마련할 방안을 찾아야 했죠.
“아빠가 서훈이에게 아빠가 되어 주어야지, 서훈이가 도리어 아빠를 돌보면 되겠어요? 서훈이가 덩치만 컸지 아직은 엄마가 필요한 아이인데 이혼을 한다 해서 서훈이에게 엄마가 없어지면 서훈이에게 해롭겠지요?”
다시 열린 조정기일에 정근씨도 이 말만큼에는 반문을 하거나 고집을 부리지 않았습니다. 서훈이를 사랑하는 마음만큼은 여느 아빠들 못지않았기에 아동 상담위원을 통해 나타난 서훈이의 마음이나 상태에 대해 정근씨가 자신을 되돌아보며 반성을 많이 하고 상담위원의 조언을 받아들이기 시작했거든요.
유엔 아동권리협약 제3조 제1항에 의하면, 아동이 관련된 사안에서는 아동의 최선의 이익(best interest of child)을 최우선적으로 고려할 의무가 모두에게 주어져 있습니다. 부모가 이혼할 때 자녀의 양육사항에 관하여도 자녀의 최선의 이익을 최우선적으로 고려하여야 하고, 그것이 앞서 말씀드린 우리 민법상 ‘자녀의 복리’를 기준으로 양육사항을 정하라는 조항에 반영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이혼 후 양육사항은 어느 한쪽 부모의 독단이나 편의, 부모간의 타협에 의해 정해서는 안 되고 전적으로 ‘자녀의 복리’ 또는 ‘자녀의 최선의 이익’을 고려하여 정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고려해야 할 ‘자녀의 의사’는 중요한 요소입니다만, 서훈이의 예에서 보는 바와 같이 그 표면적 의견이나 혹은 한, 두 번 만나서 물어보아 듣는 말로 파악해서는 안 되고, 충분한 시간을 두고 아동에게 적절한 방법을 통해 아이의 진정한 의사, 마음, 필요(needs) 등을 종합적으로 제대로 파악해야 하는 것입니다.
서훈이는 성실하고 훌륭한 아이입니다만, 일찍 철이 들고 훌륭하기 보다는 그 나이 아이답게 철없어도 행복하게 자라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한편 들었습니다. 부모인 우리가 자녀를 지켜야지, 자녀들더러 부모인 우리를 지키게 할 수는 없지 않을까요. 부모가 부모답게 자녀를 대하여 자녀는 자녀답게 편안히 자랄 수 있도록 함으로써 사랑하는 우리 아이들을 지켜야 하지 않을까요.
현재 서울남부지방법원에 재직 중이며 아동의 최상의 이익을 위해 면접교섭의 중요성 및 바람직한 방법을 안내하는 칼럼을 연재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