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 대만 타이베이 네이후 지역. 타이베이 호숫가에 자리 잡은 이 동네에 아침 일찍부터 30명이 넘는 사람들이 3200만 대만달러(약 13억 원)가 넘는 주택을 구매하기 위해 긴 줄을 섰다. 같은 시간 대만 앞바다 상공에는 중국 전투기가 등장하면서 군사적 긴장감은 최고조에 달했지만, 이들의 ‘내 집 마련’의 열기는 막지 못했다. 이날 첫 번째 대기자는 집을 보자마자 10분 만에 계약서에 사인했다. 부동산 중개업자는 “15년간 일하면서 이런 수요는 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최근 블룸버그통신은 대만을 둘러싼 지정학적 리스크가 커지고 있지만, 대만의 주택 가격이 고공행진을 이어가고 있다고 보도했다. 블룸버그에 따르면 대만의 주택가격은 10년 만에 가장 강력한 분기별 성장을 기록한 이후 지난 3월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 부동산 시장 조사업체 신이리얼티(Sinyi Realty)에 따르면 올해 2분기 대만 주택 가격은 전년 대비 3.6% 올랐다. 이는 지난해 분기 평균 상승률인 1.9%에 두 배에 달하는 수준이다.
이처럼 대만의 주택 가격의 오름세의 배경에는 FOMO 현상(Fear of Missing Out·포모)이 있다. 포모는 다른 사람은 모두 누리는 좋은 기회를 놓칠까 봐 걱정되고 불안한 심리를 뜻한다. 그간 주택 구매를 망설이던 사람들이 상대적으로 낮은 대출금리와 정부가 제공하는 주택 구매 혜택을 놓칠까 봐 두려워 너도나도 ‘내 집 마련’에 나서면서 집값이 올라갔다는 것이다.
교사로 재직 중인 비비안 시는 지난 3월 타이베이 근처에 있는 아파트를 2400만 대만달러에 샀다. 지난 5년간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 때문에 매매를 망설였는데, 더는 미룰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는 “물론 중국과의 전쟁에 대한 걱정은 있지만, 아이들에게 더 나은 기회를 주는 것이 우선”이라면서 “지금 사지 않으면 다시는 기회가 없을 것 같았다”고 말했다.
대만 부동산업체 융칭리하우스의 저스틴 첸 부매니저는 “전쟁이 발발하면 다른 곳으로 떠날 수 있는 유럽과 대만은 다르다”면서 “(전쟁) 위험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이곳은 우리가 사는 곳”이라고 말했다.
대만 사람들이 지정학적 리스크에도 지금이 집을 살 적기라고 판단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앞서 대만 정부는 지난해 내 집 마련의 어려움이 갈수록 커지고 있다는 비판이 커지자 신규 주택 구매자에 한해 대출 상환 기간을 종전 30년에서 40년으로 10년 연장하고, 첫 5년은 이자만 내도록 규제를 완화했다. 또한, 대출한도 역시 1000만 대만달러로 종전 대비 25% 끌어올렸다.
대출금리도 낮은 편이다. 대만중앙은행에 따르면 5월 기준 대만의 신규 대출 금리는 2.19%로, 싱가포르(2.9%)와 홍콩(4.1%)에 비해 낮은 편이다.
그 결과 지난 5월 대만의 모기지(주택담보대출) 승인액은 1160억 대만달러로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으며, 이 중 41%가 생애 첫 주택 구입자가 받은 정부 지원 대출이었다.
대만 최대 수출 품목인 반도체 수요가 인공지능(AI) 붐에 힘입어 급증한 것도 집값 상승세를 부추겼다. 실제로 대만 내에서 주택 가격이 가장 큰 상승 폭을 기록한 지역은 대만 TSMC 본사와 공장이 있는 신주지역이었다.
정책 실패도 부동산 가격 상승으로 이어졌다. 3년 전 대만 정부는 부동산 투기를 억제하겠다며 전매제한을 5년으로 정하고, 주택 매매에 대한 고율의 세금을 부과했다. 중개업체 차이나트러스트부동산의 첸찬하오 전무는 “과거 전매제한 등의 정책은 주택 시장 과열을 식히기 위한 것이었지만 실질적으로는 공급을 줄이고 가격을 끌어올리기만 했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대만의 기존 주택 재고 물량이 최근 1년간 약 3분의 1로 감소했다.
미국 캘리포니아 채프먼대학교에 따르면 지난해 말 기준 타이베이의 주택 매매 중위 가격은 중위 가구 소득의 16.1배를 기록했다. 싱가포르(3.8배)와 뉴욕(7.1배)보다 훨씬 높은 수준이다.
대만 중앙은행은 최근 부동산 시장 과열을 우려하며 대출기관에 지난달 21일 은행들에 대출 규모를 줄이도록 요청했다. 하지만 효과는 제한적일 것이란 전망이 지배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