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권에서 여성임원 자리에 오르는 일은 하늘의 별따기 만큼이나 어렵다. 최근 사회 전반에서 능력과 성과를 바탕으로 여성이 역량을 발휘하는 사례가 늘면서 변화의 조짐이 감지되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은행·보험·카드 등 각 금융업권에서의 여성임원 수는 손에 꼽을 정도로 여성의 고위직 승진을 가로막는 유리천장은 견고하기만 하다. 실제로 국민·우리·신한·하나 등 4대 시중은행에서 여성 부행장은 아직 한 명도 탄생하지 못했다. 본부장도 11명에 그친다.
섬세함과 포용력 있는 리더십 등 많은 장점에도 금융권에서 여성임원을 찾기 힘든 건 무엇보다 여성 인재들이 폭넓은 분야를 경험할 수 있는 기회가 제한되고 있기 때문이라는 지적이다.
◇ 유리천장 깨진다고(?)… 금융권 ‘별’ 달기 어려워 = 지난 2일 보수 성향이 짙은 지방은행에서 여성 1급 지점정이 최초로 배출됐다. 한국은행도 창립 62년 만에 최초로 여성 1급 승진자가 탄생했다.
이처럼 올들어 금융권에 여성 인재들의 파격 승진 사례가 이어지면서 타 업종보다 유독 여성임원을 찾기 힘들었던 금융권에 여풍이 불고 있다.
하지만 현실은 여전히 암울하다. 은행·보험·카드 등 금융권 여성임원을 집계해 본 결과 여전히 소수의 여성 인재만이 임원 자리에서 본인의 역량을 발휘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4대 시중은행과 기업·SC·씨티은행을 포함한 총 7개 은행의 부행장(수석부행장·부행장보 포함)과 본부장은 각각 93명, 274명으로 이 가운데 여성 부행장은 5명(5.3%), 여성 본부장은 18명(6.5%)이다. 전체 임원 중 여성 비율은 평균 6.2%에 불과하다.
외국계 은행의 여성인재 발굴은 눈에 띄는 대목. 씨티은행은 전체 임원 중 11.7%(4명)가 여성이다. 13명의 부행장 가운데 3명(김명옥·유명순·김정원)이 각각 업무지원·기업금융상품·재무기획그룹 부행장을 맡고 있으며 21명의 본부장 중 1명(김희진)이 증권관리본부장에 있다.
SC은행은 제니스 리 인사본부·변화관리추진본부 부행장 한 명을 포함해 박현주 전무(트랜젝션뱅킹부), 강명주 전무(프라이빗뱅킹사업부) 등 총 6명이 여성임원이다.
기업은행은 32명의 임원 가운데 6.2%(2명)가 여성임원으로 14명의 부행장 사이에서 권선주 부행장, 18명의 지역본부장 중 김성미 남중지역본부장이 각각 여성의 역량을 발휘하고 있다.
KB국민·신한·우리·하나 등 4대 시중은행은 아직 여성 부행장이 없다. 국민은행은 김영두 서대구지역본부장, 김해경 강동지역본부장 등 전체 임원(부행장 10명·본부장 51명)의 6.5%(4명)가 여성임원이다.
우리은행은 55명(부행장 12명·본부장 43명) 중 5.4%인 3명이 여성임원으로 홍성대 영등포영업본부장, 이남희 종로영업본부장, 김옥정 강남영업본부장이 각각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신한은행은 2명의 여성 영업본부장이 활약 중으로 여성임원은 총 임원(부행장 12명·본부장 42명)의 3.7%에 그친다. 하나은행의 경우 57명의 임원(부행장 22명·본부장 35명) 중에서 김덕자, 천경미 2명이 각각 남부영업본부장과 대전중앙영업본부장을 맡고 있다.
보험업권은 전통적으로 여풍이 세다. 특히 생명보험사에서는 여성임원 약진이 두드러진다. 푸르덴셜의 최고경영자(CEO) 손병옥 대표는 금융권에서 보기 드문 여성 CEO다. 조의주 전무(재무담당), 노경숙 상무(마케팅본부), 신은경 상무(법무자문위원)가 여성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라이나생명은 생보사 가운데 여성임원 비율이 가장 높다. 전체 임원 26명 중 12명이 여성임원으로 무려 48%를 차지한다. 서유순 사회공헌 부문 부사장 등 법무·상품개발·디지털플랫폼 등 다양한 부문에 여성임원이 포진해 있다.
대형 생명보험사 가운데서는 한화생명만 여성임원이 없다. 삼성생명은 남대희 상무(브랜드전략팀), 장인 상무(상품 통신기술팀)가, 교보생명에는 신교정 전무(자산운용내부통제담당)와 황미영·허금주 임원보가 각각 서비스회복센터, 퇴직연금사업부에 자리잡고 있다.
동양생명에는 이순남 영업이사가 자리하고 있으며, 신한생명은 지난 16일 김점옥 수도본부장과 김민자 제휴TM본부장 등 2명의 여성 인재를 본부장으로 승진시켰다.
외국계 중·소형 생보사를 살펴보면 알리안츠생명에는 지난해부터 자리를 맡은 마명옥 전무(어드바이실), 고은정 상무(법무준법경영실)가 있으며 메트라이프생명에는 하정림 전무(재무담당), 백채은 상무(법무팀), 정의선 상무(건강상해보험)가 있다.
반면 삼성화재·현대해상·동부화재·LIG손보·메리츠화재·한화손보 등 대형 손해보험사에는 아직까지 여성임원이 단 한 명도 없다. 그중 외국계 소형 손보사인 차티스손보는 여성임원이 전체 임원 가운데 21%를 차지하며 여성인재 양성에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카드사의 경우 삼성카드 상무 2명, 현대카드 백수정 이사, 비씨카드 조화준 전무(최고재무책임자·CFO) 등 여성임원이 극소수에 불과하다.
◇ 다양한 경험 쌓는 동등 기회 부여해야 = 금융권을 제외한 다른 산업분야에서는 속속 여성임원을 확충하고 있는 분위기인데 반해 금융권은 여성의 임원 진출이 오히려 퇴보하는 것 아니냐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최초로 여성 1급 지점장이 배출되는 등의 성과도 있었지만 여성임원을 줄인 곳도 있는 등 여성임원의 숫자가 좀처럼 늘지 않고 있는 탓이다. 은행업권에서는 올해 경영 여건이 보다 어려울 것으로 예상되는 가운데 이 분야 베테랑인 남성 위주로 임원진을 재편한 모습이다.
김상경 국제금융연수원장은 여성이 임원으로 승진하기 위한 제대로 된 수업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김 원장은 “임원이 되기 위해선 여러 분야에서 트레이닝이 돼야 한다”며 “하지만 여성에게는 그런 소양을 갖출 기회조차 주지 않는 게 현실”이라고 꼬집었다. 여성에게 은행업의 다양한 분야를 배울 수 있는 동등한 기회를 주는 게 먼저라는 얘기다.
그는 “여성의 경우 지점에 배치돼 개인금융만을 맡게 되는 경우가 대부분으로 시야가 좁을 수밖에 없다”며 “뱅킹 매니지먼트에서 제일 중요한 리스크 관리를 비롯해 기업금융, 여신심사, 신용위험관리, 전략기획 등을 여성들도 경험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 김 원장은 일과 가정 가운데 여성이 가정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사회시스템과 사회 풍토를 변화시킬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과장까지 오른 후 40대 초반에 대부분의 여성이 일을 그만둔다”며 “차장급에서 여성의 수가 급격히 줄어 부장과 임원 자리에는 거의 극소수만 남는다”고 설명했다.
다시 말해 임원으로 승진할 수 있는 여성 직원 수 자체가 이미 차장 직급에서 크게 감소한다는 것이다. 김 원장은 “정부 차원에서 여성이 일과 가정생활을 모두 수행할 수 있는 시스템을 신속히 마련해야 한다”며 “무엇보다 남성들도 가정일에 대한 의무감을 갖는 사회적 인식이 자리잡아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