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년 6월, 27세인 박근혜 대통령은 방한 중인 지미 카터 미 대통령의 부인 로절린 여사에게 다가갔다. 어머니 육영수 여사를 대신해 영부인 역할을 하던 그는 남편의 조깅을 지켜보던 로절린 여사에게 취약한 한반도 안보상황을 조깅에 비유하며 주한미군 철수는 안 된다는 취지의 이야기를 전했다.
당시 한미 관계는 살얼음판을 걷는 듯 위태로웠다. 주한미군 철수를 공약으로 내세워 당선된 카터 대통령은 박정희 정부와 대립각을 세웠고, 1차 정상회담 역시 썰렁하게 끝났기 때문이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생겼다. 박 대통령은 자서전 ‘절망은 나를 단련시키고 희망은 나를 움직인다’(2007)에서 이렇게 회고하고 있다.
“저녁 만찬 자리에서 만난 카터 대통령은 아내에게서 나의 이야기를 들었다고 했고 만찬 내내 내게 질문을 했다. …나중에 우스갯소리로 ‘근혜-카터 회담’이란 말까지 나왔다고 한다. 이후 카터 대통령의 행동이 달라진 데 대해서 많은 사람이 놀라워했다. 가장 중요한 안건인 주한미군 철수 계획이 결국 없던 일이 되었다.”
박 대통령은 샘이 날 정도로 외국어를 잘한다. 영어와 프랑스어는 토론이 가능할 만큼 능숙하고, 중국어와 스페인어는 간단한 대화가 가능하다고 한다.
박 대통령의 영어 실력은 카터 대통령 내외를 설득하는데 한몫을 했을 것이다. 1979년 대한뉴스를 보면 박 대통령과 로절린 여사가 통역자 없이 자연스럽게 대화하고 있는 모습이 유난히 많이 할애돼 있다.
언어에는 큰 힘이 있다. 말 한마디로 천 냥 빚도 갚는다는 속담이 있듯 상대를 마법처럼 설득할 수도 있다. 소통의 위대함이다.
그러나 여기까지다. 주요 국정 분야에서 보여준 박 대통령의 화법은 실망스럽다. 정치 무대에선 불통 논란을, 경제 분야에선 마땅히 피해야 할 오해와 억측을 불러일으켜 아쉽다.
외환시장은 아주 예민하다. 환율은 두 개의 통화가 한 쌍을 이루어 거래되는 만큼 한 쪽이 오르면 다른 쪽은 반드시 내리게 되어 있다. 게다가 국가는 통화의 최종 생산자이며, 유통시장도 강력하게 통제하고 있다. 그것도 담보조차 없이 그냥 신용으로 찍어 내고 있다.
또한 각국은 환율을 입맛대로 조작할 동기와 기회, 수단 등 ‘범죄의 3박자’까지 완벽하게 갖추고 있다. 그래서 국제사회는 어떤 나라가 환율을 조작해 자신의 국부를 훔쳐갈지도 모른다며 항상 쌍심지를 켜고 감시하기 마련이다.
그렇다고 이 엄청난 시장을 그냥 방임만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강도와 방식에 차이가 있을 뿐 모든 국가가 표시가 덜 나게 개입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래서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직설적인 표현보다 거시경제 등을 동원해 ‘위장’하거나 ‘내숭’을 떠는 게 이 분야의 화법인 것이다.
박 대통령은 취임을 앞둔 지난 달 20일 “우리 기업들이 손해 보지 않도록 선제적으로, 효과적으로 대응해 나가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외환시장에 직접 개입하려는 듯한 이같은 발언은 국제사회에서 환율 조작국이란 오명을 뒤집어 쓸 수 있다.
엔저를 둘러싼 미국과 일본의 ‘내숭극’을 보면 환율 관련 경제화법의 현주소를 알 수 있다.
먼저 일반적 예상과 달리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꼬투리 잡힐만한 언급을 거의 하지 않았다. 그는 대외적으로 물가를 2%까지 끌어올리기 위해 돈을 풀고 있는 것뿐이라고 일관되게 설명한다.
벤 버냉키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 의장도 아베 정부가 엔저를 인위적으로 유도하고 있다는 것을 모를 리 만무하지만 지난달 26일 “나는 디플레이션을 막기 위한 일본의 노력을 지지한다”며 액면 그대로 받아줬다. 지난 달 17일 폐막한 G20 재무장관·중앙은행장 회의나 22일 미·일 정상회담을 한 버락 오바마 대통령 모두 아베 정부의 엔저 유도 자체를 언급하지 않는 방식으로 사실상 엔저를 용인했다.
‘아베노믹스’의 핵심인 엔저가 ‘국제공인’까지 받으면서 아베 총리는 신바람이 났다. 지지율은 지난해 12월 취임 후 쑥쑥 치솟아 마의 벽으로 불리는 70%선을 넘어섰다. 닛케이지수가 2008년 리먼사태 이 후 최고치를 기록하고 토요타 등 수출기업의 실적이 개선되는 등 일본경제가 ‘욱일승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근혜노믹스’는 어떤가. 정부조직법 개정에 막혀 박근혜 정부가 식물정부로 전락하면서 첫걸음조차 못 떼고 있다.
건배사로 유명한‘ 통통통’이 떠오른다. 의사소통이면 만사형통, 운수대통이란 말은 우스개이지만 빠리빠리한 지혜도 담고 있다. 박 대통령이 소통에서 ‘국민 행복 시대’로 가는 실마리를 하루빨리 찾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