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한 기회에 초중고교생들이 환경문제를 주제로 썼던 원고들을 읽어보게 됐다. 인쇄를 기다리던 원고들을 검토해 달라는 기획사의 부탁을 받아 생긴 기회였다. 원고는 한 공공기관에서 주최한 백일장에서 입상한 작품들이었다. 환경문제에 대한 어린 학생들의 관심은 얼핏 보기에도 놀라울 정도였다. 한 초등학생의 글은 재미있는 상상력을 바탕으로 구성한 동화였는데 글솜씨가 탁월해서 읽는 재미가 제법 쏠쏠했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글을 다 읽고 났을 때 어딘가 모르게 석연찮은 구석이 남았다. 개중에 아무리 생각해도 입상작으로는 부족하다 싶은 원고가 끼어 있었고, 더구나 높은 성적이 매겨져 있었다. 이미 심사가 끝난 원고인 데다 평가에 간여할 일은 더욱 아니어서 묻어두고 있다가 여러 차례 다시 읽어본 뒤에 조심스럽게 의문을 전했다. 그런데 돌아온 답변은 충격적이었다. 이런 일에 학부모들의 로비가 작용하는 건 흔한 일이고, 이 또한 그건 작용 때문이 아니겠느냐는 대답이었다.
순간 ‘어른들이 나쁘구나, 나빠도 이보다 더 나쁠 수는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사회의 역량으로는 이 정도 일도 공정하게 처리하지 못하는구나’ 싶어 참담한 기분이 들었다.
경우는 다르지만 지난 1년 사이 지역사회에서 직접 보고 겪었던 이런 일들이 부지기수다.
내가 아는 한 시의원은 지난 1년 중 직접 봐온 사람 중 가장 공정한 분이었다. 본분에 충실하고자 노력하는 모습이 늘 반듯하고 성실했다. 항상 말썽이던 해외공무여행이 하기에 따라서는 얼마나 유용하고 필요한 제도인지를 몸소 실천으로 보여 주었고, 학교 밖 청소년들을 위한 조례와 지역아동센터 지원 확대 조례 제정 등의 노력은 다른 지역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성과였다. 법이 금하는 행위는 하지 않으려고 부단히 애썼다. 원칙을 지키려는 그의 이 같은 노력들이 때로는 힘겨워 보였다. 하지만 그에게는 언제나 칭찬보다 비난이 따랐다. 비난은 그의 선진적 입법 활동을 취재하려는 언론사의 인터뷰가 줄을 이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혼자만 잘났냐는 동료들의 질시와 왜 행사장에 오지 않느냐는 지역구민들의 원성, 심지어 지나치다는 시민사회단체의 평가도 그를 괴롭혔다. 아무리 훌륭한 사람이라도 한두 가지 약점은 있으련만, 누군가를 응원하고 박수 치는 일에 있어서도 우리는 지나치게 인색했고 공정하지 못했다.
어찌 지역뿐이겠는가. 입만 열면 민생을 외치던 정치권은 어떤 문제 하나도 시원하게 해결하지 못한 채 날을 새우고 말았다. 부자들의 세금을 깎아주면서 걸핏하면 담뱃값 올려보려는 시도는 여전했고, 지역차별 관행도 줄어들지 않았다. 국가 정책은 이러저런 이유를 들먹이며 식은 밥 먹듯 상식을 위배했고, 공정하려 애쓰기보다는 진영 목표를 달성하려는 집착으로 연연했다.
생명을 유지하고 돌보는 일상적인 삶의 현장에서 우리는 한사코 사심을 차단하지 못했고, 공정함에 도달하지 못했다. 이게 바로 우리가 사는 세상의 현주소다. 국가의 정책을 다루는 데서도, 지역 살림을 살피는 일에서도, 누군가를 비판하거나 박수를 치는 일에서도, 심지어 아이들의 노력을 평가하는 일에서조차 우리는 공정성을 지켜내지 못했다. 단언컨대 우리는 십 수년 전 장애인 지원금을 깎아 시의원들의 노트북 구입예산을 편성해 원성을 샀던 한 지방의회의 모습으로부터 단 한 치도 벗어나지 못했다. 오히려 기준 없이 사심을 키우면서 공공의 영역을 무너뜨려 왔고, 억울한 사람, 억울한 집단을 양산해 왔다.
큰 일에서든 작은 일에서든, 큰 바닥에서든 작은 바닥에서든 사심을 차단하지 못하고 세상이 바르게 되기를 기대할 수는 없는 법이다. 먼저 사(私)를 치유해야 공(公)에 이르는 길을 확보할 수 있다. 지난해 거세게 불었던 힐링 바람으로도 우리는 사를 치유하지 못했다. 지금 우리가 가장 먼저 할 일은 치유되지 못한 자신을 자각하는 일이 아닐까 싶다. 일시적이고 감각적인 위로를 넘어 각자 선 자리에서 조금 더 공정해 보려는 노력, 새해의 다짐으로 어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