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마을에 있는 한 대학에서는 지난해 총장이 구속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언론에 보도된 바로 그가 횡령한 액수는 어마어마했다. 공금 쓰기를 호주머니 돈을 쓰듯 했던 모양이다. 후임 총장에 잠시 교수들이 뽑은 직무대행이 다녀갔고, 다시 그 후임으로 구속된 전임 총장의 형제 중 한 사람이 차지했다고 한다. 오래지 않아 시중에 형제 간의 암투가 살벌하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복잡하기로 따지면 인근에 있는 다른 대학의 사정도 별반 다르지 않다. 그 대학에서도 얼마 전 교수들이 총장을 고발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사건은 검찰 수사를 거쳐 오랜 재판 끝에 결론에 도달했다.
일상에서 벌어지는 크고 작은 사건들을 겪고 볼 때마다 우리는 대체 상식으로부터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 돌아보게 된다. 일상에서 상식이 미치는 힘은 얼마나 허약한 것인지 느끼게 된다. 상식은 존경받아야 할 대학 총장의 파멸을 막지 못하고, 누구보다 양심적이어야 할 교수들의 부끄러움조차 제어하지 못한다. 지성의 힘으로도 마땅히 지켜내지 못하는 게 상식이구나 싶을 때, 두려운 생각마저 든다.
사람의 욕망 앞에서 특히 무기력한 게 상식이다. 힘 있는 사람들의 욕망은 끊임없이 상식을 억압한다. 억압은 대개 욕망의 크기에 비례한다. 총장은 총장만큼, 교수는 교수만큼, 그들이 가진 권력과 돈, 권위의 크기만큼 상식은 제압당한다. 그들에게 상식이란 말은 종종 고루하거나 진부한 언어로 치부된다. 지식인입네 자처하는 사람들에게도 상식은 훌쩍 뛰어넘어야 할 대상이거나 심지어 전복되어야 할 가치쯤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그러나 아직은 상식을 구하는 사람들이 많다. 상식이 지배하는 세상을 꿈꾸는 무리들은 아직 다수다. 힘없는 사람일수록 상식이 더 힘을 키워야 한다고 믿는다. 소시민들에게 법은 너무 멀다. 서슬 퍼런 권력은 무섭고, 자본은 힘이 세다. 권위는 너무 견고하다. 한낱 미약한 개인, 학위가 아니면 꿈을 이룰 수 없는 학생에게 교수의 권위를 거부하라고 말하는 건 가혹한 처사다. 세상물정 모르는 교수들에게 총장과 싸우라는 요구하는 것도 가혹한 처사이기는 마찬가지다. 영화 ‘부러진 화살’이 보여준 사례처럼 때론 가족의 생계를 걸어야 하고, 때론 패가망신할 각오도 해야 하는 일이다. 어쩌면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일지도 모른다.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의 최후처럼, 우리 주변에 비일비재한 일들처럼. 국가는 그가 하는 일을 반대하는 국민들에게 결코 인정을 베풀지 않는 법이다. 따라서 그릇된 권력의 집행, 그릇된 자본의 논리, 그릇된 권위의 남용, 그걸 돌파하는 힘이 상식에 있다고 믿는 건 만용이 아니다. 정현종의 시를 읽으며 불현듯 그런 생각이 들었다. 시인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헤게모니는 상식이 잡아야 한다고.
헤게모니는 꽃이/잡아야 하는 거 아니에요?/헤게모니는 저 바람과 햇빛이/흐르는 물이
/잡아야 하는 거 아니에요?/ (…)
헤게모니는 무엇보다도/우리들의 편한 숨결이 잡아야 하는 거 아니에요?
사회구성원 다수가 그렇게 믿고 있는 가치와 판단력, 상식은 통념이 아니다. 진부함이 아니다. 생명이 스스로를 치유하는 능력을 가진 것처럼 상식은 스스로를 복원하는 에너지를 가졌다고 믿고 싶다. ‘스스로 그렇게 있다’는 자연으로부터, 그 자연의 일부를 차지하고 찧고 까부는 권력, 부, 무수한 권위들을 무너뜨릴 힘이 상식에 있다고, 상식은 그런 거라고 믿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