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서울의 중심 경복궁을 품고 있는 북악산 자락에는 여기저기 수많은 사찰이 존재한다. 하지만 길상사처럼 약 7000 여평의 크기만큼이나 사연이 많은 사찰은 없을 것 이다. 이런 사연과 함께 서울 성북동에 위치한 길상사를 소개 하고자 지난 19일 길상사를 찾았다.
모처럼 화창한 봄 날씨와 함께 2주 남은 석가탄신일을 준비로 길상사는 다소 분주해 보였다. 알록달록 알사탕 같은 수많은 연등들이 경내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느릿느릿한 발걸음으로 소소하게 경내를 둘러보았다. 길상사는 넓지만 화려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모나지도 누추하지도 않았다. 그냥 도심 속 조용히 산책하고 사색할 수 있는 정갈한 휴식공간이었다.
길상사의 시작은 삼청각, 청운각과 더불어 3대 요정으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요정 대원각의 주인 김영한(1916~1999)과 시인 백석의 만남에서 부터다.
서울에서 태어나 유복하게 자랐던 김영한은 어느 날 집안이 몰락했다. 식구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조선 권번(券番, 기생조합)에 들어갔다. 그리고 함흥에서 교사들의 회식장소에 갔다가 백석을 만나 둘은 첫눈에 사랑에 빠졌다. 백석은 그녀의 집에 머물며 시를 썼다. 1938년에 쓴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는 그녀와의 사랑을 읊은 시로 도 유명하다. 그들의 사랑은 뜨거웠다. 그러나 백석 부모의 반대로 그들은 해어졌고 한국전쟁은 그들을 남북으로 영원히 갈라놓았다.
백석을 잊지 못해 홀로 여생을 보낸 그녀는 성북동 배밭골 일대를 사들여 대원각이라는 요정을 열어 큰부와 명예를 얻으며 치열하게 살아갔다. 그러던 어느날 그녀는 법정 스님의 ‘무소유’ 철학에 큰 감명을 받아 1000억원대의 대원각 건물과 부지를 법정 스님께 시주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그 대원각이 대한불교 조계종 송광사 분원으로 등록되어 1997년 아름다운 사찰 길상사로 거듭나게 된다. 그리고 그녀는 법정스님에세 길상화라는 법명을 받고 그녀의 유언처럼 1999년 길상사 뒤쪽 언덕에 뿌려졌다.
법정 스님도 지상에서 마지막 밤을 길상사에서 보냈다. 이 곳이 지난해 3월 일반에 처음 공개된 진영각(眞影閣)이다. 스님의 유골 비롯해 생전에 썼던 모자, 부채, 붓, 염주 같은 유품과 수십 권의 저서가 전시돼 있다. "작은 것과 적은 것으로 만족할 줄 알아야 한다"는 '소욕지족(小慾知足)'의 가르침을 배울 수 있다
길상사는 보수 작업을 거쳐 문을 열었지만, 대부분은 대원각으로 사용되던 때 그대로다. 그래서 사원의 배치가 일반적인 사찰과는 차이가 있다. 우선 일주문을 통과하면 바로 본당인 극락전이 등장한다. 길상사에서 가장 큰 건물로 오른쪽에 범종각을 두고 있다. 설법전 아래에는 관음보살상이 서 있는데, 표정이나 풍채가 색다르다. 천주교 신자인 최종태 씨가 조각한 석상으로 성당의 성모상과 인상이 비슷하다. 또 기독교 신자인 백성학 영안모자 회장이 7층 석탑을 기증했다. 길상사가 종교화합의 상징적 공간임을 기리고 있다.
길상사에는 참선과 사색을 위한 공간으로 침묵의 집이 누구에게나 개방돼 있다. 서늘한 응달에는 길이와 폭이 1m 내외인 작은 침상이 놓여 있다. 연등 만드는 작업을 하는 적묵당(寂默堂)과 '맑고 향기롭다'는 뜻의 청향당(淸香堂) 주위도 마음에 평화를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