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TBC ‘밀회’에서 오혜원(김희애)의 남편 강준형을 소화한 박혁권 인터뷰
배우 박혁권(43)의 존재감이 확고히 떠올랐다. 작품성과 흥행을 동시에 거머쥐며 종영한 JTBC 드라마 ‘밀회’에서 오혜원(김희애)의 남편인 강준형 교수로 분한 박혁권에게 시청자는 애정 어린 시선으로 ‘올라프’, ‘떼쟁이 남편’, ‘중2병 남편’ 등의 다양한 별명을 붙여 이슈를 증명했다. 여느 때보다도 폭발적인 반응으로 작품을 마친 배우 박혁권을 최근 인터뷰했다.
“좋은 작품을 했다는 게 감사하고, 뿌듯했습니다. 끝나고 나니 서운하네요. 드라마 하면서 저희끼리도 16부는 좀 짧다고 했는데 정말 유난히 그랬던 것 같아요.”
최근 실제로 우연히 차를 타고 선재(유아인)의 집을 지나오면서 기분이 묘했다고 토로한 박혁권은 여전히 강준형 교수에 푹 빠져있는 듯 했다.
“이 정도 디테일까지 있을 줄은 몰랐어요. 또 저(강준형 교수)한테는 이렇게 배드엔딩으로 끝날 줄도 몰랐고요. 이도저도 놓치고 최악의 상황이죠. 만일 17부까지 갔다면 학교도 잘렸을 것 같아요.”
극 중 서한음대 교수인 강준형은 천재형 제자 선재(유아인)를 발탁했다. 그러나 재단 산하 아트센터 기획실장이자 자신의 쇼윈도 아내인 혜원에게 제자 선재를 소개한 뒤부터 비극은 시작된다. 20세 연하의 제자와 뜨거운 마음을 나누는 아내의 상황을 눈치 채면서도, 재단과 관련한 비리와 권력에 둘러싸여 아무 조치도 취하지 못 하는 그였다.
“(극 중 강준형은) 더 조급해질수록 찌질한 행동을 하게 되잖아요. 제 역할이니까 그렇게 생각 안 했었는데 연습하다가도 ‘얘는 진짜 안 되겠다’라고 생각한 적도 있죠.”
방송 전 불륜 치정극으로 기대치를 끌어올렸던 ‘밀회’는 오히려 재벌가를 둘러싼 권력과 음모술수로 얼룩진 비리와 갈등을 그려나갔다. 혜원, 준형 등의 인물들은 거대한 권력에 의해 짜 맞춰진 채, 타인의 가치기준에 자신의 삶을 고스란히 내다바쳤다. 그 속에서 자신의 진정한 행복은 없었다.
“혜원은 선재를 통해 계기를 마련했지만, 강준형은 끝까지 그러지 못 했어요. 이런 ‘밀회’ 같은 비극이 어딨을까요. ‘밀회’는 강준형에게 처절한 비극이었습니다! 절대 해피엔딩이 아니죠. 평생 (강준형은) 구원을 못 받을테니까요.”
순수로 상징되는 선재를 만난 혜원은 ‘영혼의 개과천선’을 맞닥뜨렸다. 사회 보편적 시선에서 이들은 ‘불륜’이지만, ‘밀회’가 주는 메시지는 그 너머에 있다. 이 가운데 남편 강준형은 두 사람의 관계를 긴장시키고 갈등을 확대재생산하는 인물로서, ‘찌질’하고 ‘못난’ 면모는 ‘순수’를 상징하는 선재를 더욱 부각시켰다. 이를 표현해낸 박혁권은 특유의 자연스러운 캐릭터 소화력으로 존재감을 뿜어냈다. 탁월한 연기력이 뒷받침된 가운데 박혁권은 정성주 작가의 정교한 집필력에 물 흐르듯 몸을 맡겼다.
“대본을 여러 번 보면 어떻게 움직여야 되겠다고 느껴져요. 이렇게 하라고 (정성주 작가가) 쓰셨구나 라는 걸 파악하는 게 우선이었습니다. 특별한 해석은 많이 하지 않았어요. 연극할 때부터 좋은 대본이라면 특별한 설정은 하지 않았죠. 오히려 설정을 하면 나중에 덜그럭 거리 느낌으로 꼬일 때가 있거든요. ‘밀회’는 그대로 잘 따라가면 경우였죠. 정교한 지도였습니다.”
그의 데뷔작 MBC 드라마 ‘하얀거탑’부터 이어진 안판석 PD와 인연 역시 남다르다. ‘밀회’에서도 두드러진 안판석 PD의 완벽하면서도 자연스러움을 추구하는 연출 스타일은 박혁권의 스타일과도 꼭 맞아떨어져 시너지를 발휘했다.
“안판석 PD님의 디렉션은 처음부터 끝까지 ‘진짜처럼 해라’. ‘사람 같이 해라’ 라는 것이었죠. 안판석 PD님은 준비를 디테일하게 하세요. 진짜처럼 하기 위한 디테일들, 예를 들어 식탁에서 뭘 먹고 있다면 주방에는 재료가 남아있어야 되고요. 연기도 사실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추구하는 연기 방향 역시 ‘가짜 같이 할 거면 왜 하나. 연기는 어차피 가짜니까. 최대한 진짜처럼 하는 것’이에요. 이건 제게도 목표니까 어렵기도 한데, 재밌어요. 가짜처럼 하는 건 쉽거든요.”
만족도 높은 배우라면 감독도 자꾸 찾는 법. 찰떡궁합의 안판석 PD가 드러낸 현장 디렉션은 역시 그에게는 중요한 지표가 됐다.
“저는 믿을 수 있는 사람의 평을 주로 믿거든요. 괜히 자기도 준비 안 된 말에 상처 받기도 싫고요. 또 믿을 만한 말을 흘려버리면 안 되지요. 어렸을 때보다 경력이 쌓여가면서 느끼는 건 필요한 것과 불필요한 것을 빨리 구분해내는 것이랍니다. 물론 객관적인 시각을 바탕으로요. 대본에서도 단지 ‘운다, 웃는다’라는 표현적인 것에 신경 썼다면 이제는 하루 하루 진실 되게 잘 살아가는지, 어떤 시선을 유지하는지가 가장 중요하다고 여기고 있지요.”
어딘가 실제 있을 법한 인물의 모습을 추구해 표현해내는 박혁권의 연기 지론은 이번 ‘밀회’에 함께 출연한 연기자 김창완의 면면을 연상시켰다. 박혁권은 이에 동의하며 “같이 하다 보면 깜짝 놀랄 때가 있다. 그야말로 날 것, 정형화 되지 않은 게 튀어나오더라. ‘밀회’에서는 아역배우부터 함께한 다른 출연진 역시 그런 부분이 되게 많았다”고 했다.
아울러 박혁권은 오혜원과 선재를 연기한 김희애, 유아인에 대해 각각 “연기 분석이 뛰어난 배우”, “감각이 좋은 배우”라고 호평했다. 그는 나이 차가 크게 나는 혜원과 선재, 두 남녀의 불륜 소재를 둘러싸고 양 극단으로 나뉘는 시청자의 반응에 대해서도 입을 열었다.
“(혜원과 선재의 로맨스가) 인위적이지 않고 자연스러운 흐름에 놓여있지 않았나 싶어요. 긴장감을 놓치지 않으면서 이를 작품으로서 잘 만들어낸 게 작가님과 감독님의 원천기술이죠. 둘의 관계를 목적으로 볼 때, 강준형 교수는 따지고 보면 장애물이거든요. 장애물이 설치되면 목적과 의지가 더욱 강화되잖아요. 특히 빈 공연장에서 혜원과 선재가 숨어 있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고 소리치는 장면을 통해 현장에서도 연기 칭찬을 많이 들었는데요. 개인적으로 이는 순전히 작가와 연출의 힘으로, 앞뒤 맥락과 상황에 적절히 배치된 덕택이라고 생각합니다.”
박혁권은 “‘페스트(Pest, 2013)’라는 영화를 보고 ‘와, 꼼꼼한 놈을 만났다’라고 생각했다”며 “너무나도 꼼꼼한 프랑스 영화를 좋아한다. 저 역시 꼼꼼하려고 노력하는 편이기 때문이다. 작품의 메시지는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다. 단지 진짜 같았는지가 가장 중요하다”고 했다. 이어 그는 “살아가는 것 그대로 보여줄 수도 있는데 우리나라 드라마나 음악은 꼭 기승전결을 지켜야한다는 강박관념이 있다”고 역설했다. ‘밀회’는 그런 의미에서 배우 박혁권에게 복이었다.
“제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공부하고 작업했던 기준으로 봤을 때, 충분히 자부심을 느끼는 작품을 만들어냈느냐가 중요한 것 같아요. ‘밀회’는 충분히 만족도란 부분에서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저희들이 정확히 만들어내고 나면 그 다음의 평가는 더 이상 저희의 몫이 아닙니다. 연기에 있어서도 ‘좋은 작품을 만들어내야지’가 아닌 ‘인기를 얻어야지’가 목표가 되면 작품의 변질 소재가 큰 것 같고요. 가장 중요한 건 ‘내가 얼마나 정성들여 만들어 냈나’라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