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태성 뉴욕특파원
그중에서도 눈길을 끄는 것은 단연 브릭스(BRICS)다. 골드만삭스그룹의 전 고위 임원이 지난 2001년 만들어낸 브릭스는 이후 아프리카를 비롯해 그 밖의 신흥국들에 밀리면서 한동안 잠잠했지만 최근 국제사회의 이슈로 다시 떠오르고 있다.
브릭스 회원국인 브라질, 러시아, 인도, 중국, 남아프리카공화국 등 5개국 정상은 개발은행 설립을 추진하고 있다. 브릭스개발은행의 슬로건은 ‘새로운 개발을 위한 은행’이다. 본부는 중국 상하이에 들어서고 총재는 브라질인이 맡을 전망이다.
흥미로운 것은 개발은행에 회원국 외 다른 나라도 참여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브릭스 회원국이 55% 이상의 지분을 보유해 운영권을 갖지만 사실상 모든 나라에 문호를 개방한 것과 같다.
브릭스개발은행이 출범하면 세계은행(WB)과 국제통화기금(IMF)의 역할을 일부 대체할 전망이다.
이 같은 움직임은 미국을 중심으로 서방 선진국이 이끄는 기존 글로벌 경제체제를 뒤흔들 수도 있다. 일각에서 브릭스가 국제질서의 재편을 모색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오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중국이 구매력 기준으로 미국을 제치고 세계 최대 국내총생산(GDP) 국가로 떠올랐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사실상 글로벌 경제는 물론 국제질서도 다시 짜이고 있다.
브릭스의 반격을 주도하는 나라도, 뒤에서 웃는 나라도 중국이다. G2의 진정한 경쟁은 이제부터인지도 모른다.
한국도 급격한 국제 정세의 변화에 발맞춰 실리 외교를 펴야 한다. 과거 냉전시대와 같이 맹목적인 도움과 지원을 바라던 때는 지났다.
집단자위권 행사 등에서 미국이 일본의 손을 들어준다고 뒤에서 비난만 하면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 줄 것은 주고, 받을 것은 받는, 그러면서도 존재감을 키우는 외교 전략을 짜야 한다.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로서 다른 나라보다 몇 배의 외교 노력을 기울여도 모자란 상황이다. 과연 국제사회에서 한국의 위상은 어떤가.
멀리 볼 것도 없이 G2 사이에서도 한국은 어정쩡하다. 박근혜 대통령은 북한이 비핵화 진정성을 행동으로 먼저 보여야 한다는 입장을 거듭 밝히고 있다. 그러나 미국 의회조사국 출신의 한 전문가는 미국 대북정책의 진짜 목표는 한반도의 비핵화가 아닌 본토 방어라는 분석을 최근 내놨다. 미국이 겉으로는 한반도의 비핵화를 외치지만 결국 자국의 이익에 충실한 외교를 펼치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과 미국 그리고 중국 정부의 관리들 사이에는 협상으로 북한의 핵 개발 포기를 설득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공감대가 형성됐다는 말도 나온다.
최근 한중 정상회담 결과도 아쉽다. 박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경제협력 등에서 어느 정도 성과를 내기도 했지만, 중국은 북한을 버리지 못했다.
월스트리트저널은 시 주석이 한국을 방문한 것도 결국 일본을 압박하기 위한 것이라고 평가했다. 이는 중국이 북한에 대한 외교와 경제적 관계를 빠르게 바꿀 의사가 없다는 것으로도 볼 수 있다.
한중 정상회담 이후 워싱턴 싱크탱크를 중심으로 중국이 북한과 관련해 위기를 조장하는 조치에는 적극적으로 반대하고 있다는 분석도 나왔다.
북한이 붕괴하면 난민이 밀려 들어올 수밖에 없다는 것도 중국 입장에서는 실질적인 고민이다. 한국의 흡수통일도 중국으로서는 반갑지 않다. 국경을 맞대고 미군과 대치하는 상황이 펼쳐질 수 있기 때문이다.
미국을 전통적인 우방이라 여기는 한국이 중국과의 관계 강화를 원하고 있지만,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는 이유다.
한국이 G2 양쪽을 모두 아우르기 위해서는 ‘우물 안 개구리’ 식이 아닌 보다 적극적이고 전략적인 외교가 필요하다. 미국의 아시아 중심 외교 선회에 대해 중국은 아시아 재편의 중심은 바로 중국이라는 메시지로 반격하고 있다는 사실도 고려해야 한다. 중국이 주도하는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 가입 문제도 당장 발등의 불이다. 중국은 참여를 촉구하고 있고, 가입하자니 미국이 신경 쓰인다. 냉정하게 우리에게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심사숙고해야 한다.
한반도는 열강에 의해 남북으로 분단돼 70여년간 고통과 희생을 감수해 왔다. 이제는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벗어나야 한다. 한국의 전략적 가치를 보여주고 남북 분단이 더는 열강의 이익이 아니라는 것을 설득해야 한다.
‘잃어버린 70년’을 또 겪지 말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