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계 고위 관계자는 17일 “경영 불확실성이 높아지는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무작정 투자만 늘리라고 하는 것은 큰 모험을 하라는 뜻인데, 요즘 같은 시기엔 도저히 불가능하다”고 강조했다. 이어 그는 “성장동력을 확충하기 위해선 투자해야 한다는 것을 기업들 스스로가 더 잘 알고 있다”면서 “세월호 참사 여파와 말뿐인 규제개혁, 환율 불안 등 악재가 겹쳐 움츠러들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며 답답한 심정을 토로했다.
기업경영성과 평가사이트 CEO스코어에 따르면 올 1분기 말 기준 10대 그룹 81개 상장사(금융사 제외)의 사내 유보금은 515조9000억원으로 5년 새 2배가량 늘었다. 비교 시점인 2009년 10대 그룹의 사내유보금은 271조원이었다. 사내유보금을 자본금으로 나눈 유보율도 2009년 986.9%에서 올 1분기 1733.9%로 747%포인트나 상승했다.
10대 그룹 중 사내유보금이 가장 많은 곳은 삼성으로 182조4000억원을 보유 중인 것으로 조사됐다. 이 중 삼성전자의 유보금이 158조4000억원으로 86.8%를 차지한다. 이어 현대자동차 113조9000억원, SK 58조5000억원, LG 49조6000억원, 포스코 44조5000억원, 롯데 26조7000억원, 현대중공업 19조4000억원, GS 11조6000억원, 한화 7조3000억원, 한진 2조원 등 순으로 집계됐다. 한진의 경우 10대 그룹 중 유일하게 2009년보다 사내유보금이 절반 이상 줄었다. CEO스코어 박주근 대표는 “유보금에는 현금 외에 투자로 인한 유형자산과 재고자산 등이 포함돼 있어 곳간에 현금이 쌓여 있다고 볼 수 없다는 시각도 있다”고 부연했다.
재계는 몇 년째 이어지는 글로벌 경기침체 속에서 투자를 확대하기 위해 정부가 나서 불안요소들을 적극적으로 제거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애초에 기대했던 것보다 더디게 진행되는 규제 개혁의 속도를 낼 필요가 있다는 것.
현재 국회에 처리를 기다리고 있는 경제활성화 법안은 자본시장법 개정안 등 70여개에 이른다. 이 중 각종 서비스산업의 규제를 푸는 서비스산업발전기본법, 유해시설이 없는 관광숙박 시설을 학교환경위생 정화구역 내에 세울 수 있도록 하는 관광진흥법 개정이 급히 통과돼야 할 법안으로 꼽힌다.
한 대기업 임원은 “수년간 지속된 원화 강세로 인해 수출 경쟁력이 크게 떨어진 상황”이라며 “기업들의 자구노력만큼이나 정부가 투자를 가로막는 요소를 최소화해 주는 것도 중요하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