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려운 가정에서 자란 마리 퀴리(1867~1934)는 아버지에게서 받은 어린 시절의 경험을 바탕으로 자녀교육에 나섰다. 두 딸은 둔 퀴리 부인은 요즘 맞벌이 부부가 겪는 것과 같은 고민에 빠졌다. 때마침 시어머니가 유방암으로 숨을 거두자 홀로 남게 된 시아버지(외젠느 퀴리)를 모시고 함께 살게 됐다. 퀴리 부인이 대학의 실험실에 있는 동안 자연스럽게 할아버지가 손녀를 돌보게 되었다. 이미 자신의 두 아들을 과학자로 키운 바 있는 할아버지는 손녀가 자연스럽게 과학에 호기심과 관심을 두도록 유도했다. 또 빅토르 위고 등의 문학작품을 읽어주면서 문학적 소양을 갖도록 이끌었다. 우리나라에서도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이러한 격대교육의 참모습은 ‘노벨상 명가’라고 할 수 있는 퀴리가(家)에서도 발견된다. 의사이던 외젠느 퀴리는 아들 피에르에 이어 손녀 이렌느까지 노벨상을 타게 한 것이다.
퀴리가에서 배울 수 있는 또 다른 덕목은 바로 요즘 시대에 더 요구되는 ‘양성평등 정신’이라고 할 수 있다. 여성의 사회진출이 활발해짐에 따라 권위적인 남성은 결코 사회에서나 가정에서도 설 자리가 없다. 퀴리 부부는 여성에 대한 사회적 차별과 불평등이 개선되지 않은 100여 년 전에 이미 ‘평등부부’ 정신을 실천해 노벨물리학상을 공동 수상했다. 이들의 평등부부 정신은 그의 딸 이렌느 부부에게도 대물림돼 노벨화학상의 영예를 안겨 주었다. 재미있는 사실은 이렌느의 남편인 졸리오는 퀴리가의 학문적 가풍에 매료돼 ‘졸리오-퀴리’로 성을 바꾸기도 했다는 점이다.
이는 퀴리 부부와 교류했던 아인슈타인 부부와는 대조적이다. 스위스 취리히 공과대학 물리학과의 캠퍼스 커플이던 이들은 처음에는 연구 동반자였는데 나중에 아인슈타인이 연구 결과를 독식했다고 한다. 아인슈타인은 1921년 노벨물리학상을 혼자 받았다. 아인슈타인은 아내와 결혼 16년 만에 바람을 피우고 이혼한 후 사촌 여동생과 재혼했다. 아인슈타인의 아들은 정신병원에서 평생을 보냈다.
노벨상 명가를 만든 퀴리가의 또 다른 비결로는 ‘품앗이 교육’을 들 수 있다. 퀴리 부인은 두 딸을 위해 자신이 몸담고 있던 소르본대학 교수들과 함께 이른바 ‘협동 학교’를 운영하며 자녀를 직접 가르치는 등 남다른 열정을 발휘했다.
퀴리가는 4대에 걸쳐 과학자를 배출하고 있다. 퀴리 부부와 이렌느 부부가 노벨상을 공동으로 받은 데 이어 이렌느의 딸 엘렌도 물리학자가 되었다. 또 엘렌의 두 아들도 물리학자가 되면서 ‘과학 명문가’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과학적 재능이 모계로 대물림되고 있는 점도 특징이다. 그런데 그 재능은 유전적 요인보다 부모와 가족들의 관심으로 만들어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