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산업 후진성 벗어나지 못해…규제개혁·수익다변화·담보위주 영업태도 개선 시급
영국 더 뱅커(The Banker)지의 세계 1000대 은행 순위집계에 따르면 지난해 말 기준 자기자본 기준으로 세계 100위 안에 든 국내 은행은 KB금융지주, 신한금융지주, 우리금융지주, 산은금융지주, 하나금융지주 등 5개뿐이다. 국내 금융산업에 대한 평가는 아직 후진성을 못 벗어났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이런 가운데 올 상반기 은행, 보험, 증권 등 금융권은 각종 사건·사고로 잡음이 끊이지 않으면서 가장 중요한 고객 신뢰마저 바닥에 떨어졌다. 또 금융권 전 업종의 수익성 회복은 답보상태며 가계부채는 1000조원에 육박하면서 금융회사의 리스크 관리 문제가 잠재적 시한폭탄으로 떠오른 상황이다.
이에 본지는 국내 경제·금융 전문가 8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 금융산업 선진화 방안을 비롯해 고객 신뢰 회복 방안, 부동산 규제 완화에 따른 금융시장 영향, 통화·외환 정책, 기술금융 개선 방안, 가계부채 급증에 따른 금융권 리스크 관리 방안 등 향후 금융산업이 나아가야 할 길을 물었다.
◇ 금융산업 선진화 방안 3요소 = 대부분의 전문가들은 국내 금융산업의 선진화 방안으로 △정부 규제개혁 △은행사업 포트폴리오 및 수익구조 다변화 △담보대출 위주의 자금중개 관행 등 금융기관의 보수적 영업태도 개선을 가장 중요하게 꼽았다.
전문가들은 특히 금융기관의 보수적 영업태도를 개선해야 한다는 데 한목소리를 냈다. 지금처럼 모든 은행이 가계의 담보대출 위주로 영업을 하는 구조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차별화와 발전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것. 전문가들은 담보대출 위주의 자금중개 관행이 국내 금융산업의 후진성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라고 지적했다.
전문가들은 이 같은 관행을 개선하기 위해 주거래은행 제도에 기초한 관계형 금융 역량을 강화하고 기술금융 등과 같은 신사업 분야에 적극 참여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이자수익에 주로 의존하고 있는 수익구조와 경직된 정부 규제도 금융선진화를 저해하는 요인으로 지적됐다. 무엇보다 정책당국이 시장의 자율조정 기능을 강화해 금융기관의 경쟁력 격차가 실적 차별화로 이어질 수 있도록 시장 중심의 규제개혁을 과감하게 추진해야 한다는 데 이견이 없었다.
한 연구소장은 “금융기관들은 고객 니즈에 맞는 상품개발 등 차별화 노력을 통해 업무영역의 쏠림현상을 완화하고 양적 성장에서 벗어나 질적 성장을 추구할 필요가 있다”면서 “또 공공성에 심각한 문제가 없다면 금융기관 스스로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도록 정부 규제를 최소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 고객신뢰 회복 방안 = 올 상반기 은행, 보험, 증권 등 금융권은 각종 사건·사고로 잡음이 끊이지 않았다. 정보 비대칭성이 심한 금융산업에서 소비자의 신뢰가 하락하면 금융거래와 금융서비스가 축소돼 경제 전반에 부정적 영향을 줄 수 있다.
전문가들은 국내 금융산업이 신뢰를 상실한 이유로 단기 성과주의 집착, 지배구조 문제, 고객 소통 부족, 금융환경 변화 대응 부족, 금융사고 발생 등을 꼽았다.
이에 따라 단기 실적주의 및 은행 지배구조 문제를 개선하고 금융산업 종사자들의 책임의식 강화 및 고객 소통 확대, 금융당국의 관리감독 강화 및 금융기관 내부 통제시스템 투명성 제고 등을 통해 고객 신뢰를 회복해야 한다는 의견이 제시됐다.
특히 금융당국은 고유의 감독 기능과 더불어 소비자를 대상으로 금융교육 기능을 대폭 강화하고 금융기관은 고객만족 경영의 틀 안에서 내부 통제시스템의 투명성을 제고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경제연구소장들은 “금융회사의 단기적 성과 위주의 영업과 금융의 공공성에 대한 사회적 요구와 관련된 금융 종사자의 책임의식 부족, 소비자보호시스템 미흡 등이 문제”라며 “금융산업의 신뢰 회복을 위해서는 시스템 구축을 위한 금융당국의 적극적 역할과 더불어 금융산업 종사자들의 책임의식이 강화될 필요가 있다”고 입을 모았다.
◇ 정부의 규제개혁 평가 = 전문가들은 정부의 금융 규제개혁 노력에 대해 대체적으로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수익성 개선이 금융회사들의 과제로 부각된 상황에서 최근의 금융 규제개혁은 금융회사의 업무범위 확대와 경영자율성 보장에 기여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다만 규제완화에 따른 부작용이 발생하지 않도록 철저히 모니터링하고 상시적 관리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고 부연했다. 또한 지속가능한 수익창출 능력을 확보하기 위한 금융회사의 적극적인 노력도 병행돼야 한다는 의견이 제시됐다.
업권 간 공정한 규제가 이뤄져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었다. 한 경제연구소 대표는 “정부에서 각종 규제를 풀겠다는 것은 잘하는 것”이라면서도 “다만 한쪽 업권의 이야기만 들을 것이 아니라 은행업, 보험업, 증권업, 대출업 등 각 부분의 이해와 득실을 따져 공정하게 업무를 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또 다른 전문가는 “업권별 칸막이 규제를 허물지 않으면 규제개혁은 자칫 업권 간 밥그릇 싸움으로 귀결될 수 있다”며 “고객보호를 위해서라면 단순한 가격규제보다는 정보공개나 계좌이동제 등을 통해 고객의 선택권을 강화하고 실질적으로 혜택을 주는 방식이 바람직하다고 본다”고 조언했다.
◇ 부동산 규제완화에 따른 금융산업 영향 = 정부가 부동산 시장과 내수경기 활성화를 위해 주택담보대출비율(LTV) 및 총부채상환비율(DTI) 완화에 대해서는 시각이 엇갈렸다.
LTV·DTI 완화로 주택거래량이 증가한 것은 경기회복 측면에서 볼 때 긍정적이지만, 향후 가계부문의 재무건전성 악화와 금융부실로 이어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전문가들은 특히 LTV·DTI 완화는 긍정적 측면과 부정적 측면을 모두 가지고 있어 금융권은 긍정적 측면을 잘 활용하면서도 리스크가 확대되지 않도록 대비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한 전문가는 “금융권의 가계대출에 대한 자율적 리스크 관리 역량을 높이는 계기가 될 수 있다”며 “리스크 통제시스템이 성공적으로 구축된다면 오히려 산업이 성장하는 기회로 작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일각에서는 가계부채 문제가 더 심화될 것이라는 우려도 제기됐다. 만약 부동산 경기가 살아나지 않으면 대출자들이 부채 디플레이션에 빠져 경제 전반에서 서브프라임과 같은 경기악순환이 발생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또 미국의 기준금리 인상 등 대외적 충격 발생 시 국내 시중금리 인상으로 원금과 이자를 감당하지 못해 파산하는 가계가 급증할 우려도 있다고 전문가들은 경고했다.
◇ 통화·외환 정책 = 전문가들은 내수경기 진작과 미국의 기준금리 인상 등에 따른 금리 상승압력이 가시화될 때까지 현재의 통화정책 기조를 유지할 필요가 있다는 데 의견을 같이했다. 이에 따라 당분간 금리가 동결될 것이란 전망이다. 금리 인상 시기에 대해서는 내년 하반기, 또는 그 이후로 전망하는 의견이 많았다.
한 경제연구소장은 “내년 미국이 금리를 인상한다면 양국 간 금리 차이로 인한 외국인의 자금유출을 막기 위해 우리나라도 금리 인상 압박을 받을 것”이라며 “동결기조를 유지한 후 내년 상반기 중 인상기조로 전환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또 지난 1년 전과 비교하면 원화 강세가 큰 폭으로 진행됐지만 정부의 거시건전성 3종 세트 시행으로 외환보유고가 확대되고 은행의 차입구조가 장기화되는 등 국내 외화건전성은 양호한 상태를 유지할 것으로 내다봤다.
아울러 향후 글로벌 외환시장의 변동성이 더욱 확대될 가능성이 있는 만큼 정부는 시장의 일방적 쏠림현상이 발생하지 않도록 대응하는 한편 최근 낙폭이 확대되고 있는 원·엔 환율 동향 및 수출기업의 영향에 대해서도 지속적인 모니터링을 강화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기술금융 활성화 = 금융당국이 담보 없이 기술만으로 대출을 실행하는 기술금융을 확대하기 위해 다양한 방안을 내놓고 있지만 정작 현장에서는 실효성에 의구심을 드러내고 있다.
전문가들은 정책적 개입을 통한 기술금융 활성화는 바람직하지만 인적·물적 비용과 시간이 소요될 수밖에 없다고 봤다.
인력과 시스템 인프라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모두 인식을 같이했다. 기술금융 시스템이 갖춰지기 위해서는 모형 구축, 부실률 등 데이터 확보를 비롯해 전문성을 갖춘 인력 확보 등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시스템이 갖춰져 있지 않은 초기 단계에서는 기술평가회사에 대한 수수료 부담 완화, 기술보증 규모 확대 등 정책적 지원이 병행돼야 한다고 말했다.
또 기업의 신기술을 정교하게 평가하기 위해서는 비용과 시간이 소요될 수밖에 없으므로 금융회사들이 공동 출자해 기술평가기관을 신설하거나 기술보증과 같은 공적 기관의 기능과 역할을 확대하는 것을 강구할 필요가 있다고 제안했다.
아울러 리스크 관리 차원에서 국제감독 규정인 바젤Ⅱ·Ⅲ와 상충되는 부분이 없는지 점검하고 일부 조항의 적용 예외 또는 유예 방안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는 의견도 나왔다.
◇수익성 회복 위한 해외진출 및 대형화 = 해외진출을 통한 사업 다변화는 국내 금융기관이 저성장·저금리 환경에 대응하기 위한 생존전략이 됐다.
금융회사의 성공적인 해외 진출을 위해서 전문가들은 글로벌 전략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았다.
특히 인력 운영의 현지화가 중요하다고 역설했다. 금융회사가 진출국의 현지 금융환경, 고객특성, 경쟁현황 등에 대해 면밀히 분석해야 한다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지점 및 현지법인 설립 등 전통 방식에서 벗어나 현지은행의 인수·합병, 전략적 제휴 등 다양한 전략이 필요하다고 제안했다.
한 전문가는 “해외 진출 역사가 50년이 지난 시점에서도 인력의 현지화는 매우 낮은 수준”이라면서 “한국에 진출한 유수의 글로벌 은행들의 경우 몇 명의 인력을 제외하고는 모두 한국인으로 구성돼 있다”고 꼬집었다. 인력의 현지화가 이뤄지지 않는 이상 국내 기업이나 교포 위주의 영업이 반복될 수밖에 없다는 지적이다.
아울러 금융회사들이 현지 진출 과정에서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는 만큼, 현지 인허가를 신속하게 받을 수 있도록 정부 대 정부 차원의 대화와 적극적인 협력 노력이 필요하다고 금융당국에 주문했다.
2000년대 이후 정부 주도의 신흥국 사회간접자본(SOC)시설 개발에 동반 참여해 해외진출에 성공한 일본 금융회사의 사례를 참고해야 한다는 의견도 나왔다. 신흥시장의 국책사업 및 민간투자 사업에 민관 합동으로 참여하는 방안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한편, 국내 금융회사의 대형화에 대해서는 득과 실을 함께 볼 필요가 있다고 전문가들은 조언했다. 자금중개, 정보화투자, 신상품 개발 등에서 ‘규모의 경제’ 효과가 있지만 리스크가 커질 수 있다는 설명이다.
또 자본의 규모는 글로벌 시장에서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해 중요한 요인이지만 인위적인 대형화보다는 핵심 역량을 갖추는 것이 중요하다고 밝혔다.
한국경제의 발전을 위해서는 대형은행, 전문화된 중형은행, 소형지방은행 등이 다양하게 생존할 수 있는 생태계를 조성하는 것이 시급하다고 분석했다.
글로벌 시장에서 경쟁하는 대형 금융회사가 되려면 자기자본, 자산규모뿐 아니라 인재와 시스템의 글로벌화, 무엇보다 이를 진두지휘하는 CEO가 국제적인 감각과 전문지식을 갖춰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다.
또 다른 전문가는 “대형화는 글로벌 경쟁력을 키우기 위한 필수 요건은 아니다. 해외에서의 자금 조달 등의 이점을 가질 수 있으나 50~60위권 수준이면 충분히 경쟁력을 가질 수 있다”면서 “수익 다변화 측면에서 핵심 역량을 보유하고 글로벌 비즈니스를 확대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힘주어 말했다.
◇글로벌 투자은행(IB) 성장 조건 = 전문가들은 국내 금융회사가 글로벌 IB로 도약하기 위해서는 시장 중심의 금융 시스템이 뒷받침돼야 하지만 우리는 은행 중심의 금융시스템을 지니고 있어 토양이 부실하다고 분석했다. 국내 은행의 IB사업이 실패한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또 선택과 집중을 통해 특화된 IB사업 부문을 육성해 글로벌 수준의 핵심 역량을 보유하는 것이 선행돼야 한다고 보았다.
정부에 대해서는 글로벌 인프라 관련 투자처 발굴, 금융회사 진출시 보증 및 동반투자 등 보다 적극적인 지원이 필요하다고 당부했다.
아울러 국내 금융산업의 구조적 특성을 반영하는 IB 운영체계를 구축하는 정책 연구를 수행할 필요가 있다는 의견도 이어졌다.
현재 글로벌 자본시장은 몇몇 글로벌 IB들이 주도하고 있으며 경험과 네트워크의 부재로 국내 금융회사가 글로벌 IB로 성장하기란 쉽지 않은 실정이다. 호주의 맥쿼리처럼 특정 분야에 특화된 IB를 육성하는 것이 하나의 방안이 될 수 있다고 전문가들은 조언했다.
국내 IB들도 천편일률적 영업 방식에서 벗어나 프라임 브로커, 기업금융 등 영역을 확장해 차별적이고 전문적인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는 기반 마련에 매진해야 한다는 주문이다.
◇가계부채 급증에 따른 금융권 리스크 관리 = 전문가들은 가계 및 기업대출의 연체율이 다소 올라갔지만 대출 확대에 따른 요인으로, 크게 걱정할 수준은 아닌 것으로 판단했다.
가계대출이 지난 몇 년간 크게 늘고 중기대출 확대 기조가 지속되면서 전반적으로 가계 및 기업대출의 연체율이 상승하는 측면은 있지만, 은행권 감내 수준이라는 설명이다.
하지만 급증한 대출이 3~4년의 시차를 두고 연체율 급증으로 이어지지 않도록 은행권 부채의 적정 수준 관리는 반드시 필요하다는 데 공감했다.
특히 전문가들은 가장 큰 문제로 특정 산업에 대한 대출의 쏠림 현상을 꼽았다.
리스크는 수익에 비례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지만, 수익률과 손실 가능성 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하면서 쏠리지 않은 자산배분이 중요하다는 분석이다.
한 금융연구소장은 “가계나 기업에 대한 대출 쏠림은 부채 구조의 건전성을 악화시켜 경기 하강시 동반 부실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면서 “경기 순환의 틀 안에서 산업이나 가계의 대출 여력을 면밀히 분석해 대출 쏠림을 선제적으로 차단하는 등 여신 포트폴리오의 산업 편중 리스크를 체계적으로 관리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아울러 최근 주택담보대출 LTV 완화에 따른 ‘대출 갈아타기’로 은행권 주택담보대출이 급증하면서 신용 리스크 악화에 대한 우려가 높아 은행과 감독당국의 면밀한 모니터링이 필요하다는 주문도 이어졌다.
기업대출은 잠재 부실이 현실화될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어 경기 민감 업종을 중심으로 모니터링을 강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