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대별로 살펴본 ‘밑바닥 경제’
수년간 계속된 불황은 모든 세대의 지갑을 닫아버렸다. 취업이 안되니 쓸 돈이 없고, 장사는 예전만 못해 지출을 줄인다. 한국 경제가 활기를 잃었다는 분석 뒤에는 단위 기업이나 업종의 불황을 뛰어넘는 민생경제의 수직하락이 크게 자리하고 있다.
‘열심히 살지 않아서’ 어려운 게 아니다. 불황은 그만큼 깊다. 대한민국 경제활동인구의 오늘을 세대별로 살펴본다.
김씨는 시험공부에만 전념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러나 지난 9월 서울시에서 실시한 7, 9급 시험의 경쟁률은 무려 87.1 대 1이었다. 벌이 없이 공부에 집중한 지 1년째, 모아둔 돈이 전부 바닥났다. 결국 김씨는 다시 비정규직으로 떠밀렸다. 그 이후부터 지금까지 20개월 동안 그는 3차례의 이직과 2~3개월의 공백 기간을 거쳤다. 김씨는 “이제 공무원이 아니라 공무원 시험을 준비할 환경을 원한다”고 말했다.
취업을 위한 취업은 4년제 대학 졸업생에게도 예외가 아니다. 같은 날 안양에서 만난 김리나(29)씨는 유명 S대 경영학을 전공했다. 그는 대기업 인사관리직에 수차례 지원했지만 고배를 마셨다. 김씨는 ‘취업 재수’를 택했다. 김씨는 월 100만원 벌이가 못되는 국어강사 일을 하면서 학자금 빚을 갚아나갔다. 지난해 20~29세 청년층의 경제활동인구는 61.9%로 최저 수준이었지만, 김씨는 일주일에 두세 번 학원을 나가고도 경제활동인구가 됐다.
최근 김씨는 중소기업의 사무직에 취직했다. 계약은 1년마다 갱신된다. 세금을 떼면 매월 176만원을 받는다. 12월에 계약이 끝나는 김씨는 이직을 준비 중이다. 그는 대졸 출신 비정규직 31.0% 중 한 명이다.
그는 “2억원대에서 서울 시내 아파트 전세를 구하기란 하늘의 별 따기”라고 표현했다. 통계에 따르면 서울 시내 전세가 3억원 이하인 아파트는 5년 새 26만 가구가 줄었다. 서울 외곽의 아파트도 2억원을 가볍게 웃돈다. 빌라마저 1억5000만원을 넘어섰다.
최씨의 결혼 예상 비용은 총 2억원 안팎이다. 평균 결혼비용인 2억4000여만원보다 낮춰 잡았지만 연봉 3000만원인 최씨와 중소기업에 다니는 예비신부 월급으로 이 돈을 마련하기란 불가능하다. 그는 “은행과 부모님 아니었다면 결혼을 못했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같은 날 강남에서 만난 박미연(31)씨의 고민은 출산이다. 남편이 버는 수입은 월 300만원 정도. 결혼 직후 직장을 그만 둔 박씨는 출산 계획을 세운 후 다시 일자리를 알아보고 있다. 그는 “아기를 낳으려면 내가 일을 다시해 보태야 한다”고 말했다.
중소기업에 다니는 강형석(31)씨는 3년 사귄 여자친구와의 결혼을 미뤘다. 8일 낮에 방문한 서울 성북구에 위치한 그의 집은 반지하 월세였다. “지금 받는 월급으로는 이 정도 사는 게 고작”이라는 강씨는 “물려받을 재산도 없어 결혼은 불가능한 상태”라고 설명했다.
통계에 따르면 2012년 남녀의 초혼 연령은 남자 32.1세, 여자 29.4세로 해마다 늘고 있다. 결혼을 미룬 원인 중 첫 번째는 ‘결혼자금’ 때문인 것으로 나타났다. 강씨는 “결혼 후의 생활까지 감안한다면 돈을 더 벌어야 결혼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직장인인 남편의 월수입은 600만원대로 적은 편은 아니다. 하지만 이전에 살던 집의 전세금으로 대출한 4000만원이 남아있고 현재 살고 있는 곳의 전셋집마저 전세금을 올릴 것이기에 여유가 없다. 4일 KB국민은행에 따르면 2년 계약으로 전세에 들어온 세입자가 계약연장 위해 필요한 돈은 평균 5000만원이다.
고등학고 1학년 아들이 하나 있는 그는 “아직 (경제적 목표의) 절반 정도도 못 온 것 같다”며 답답함을 드러냈다. 남씨의 남편은 정년퇴직이 얼마 남지 않았다. (전세금 상승 때문에) 목돈 마련을 위해 보험에 들었지만 노후대비는 하지 못한다는 남씨는 “큰 돈 들어갈 일은 여전히 남아 있는데”라며 말끝을 흐렸다.
집 문제가 해결됐다고 해서 형편이 확 달라지는 것도 아니다. 경기도 일산에 거주하는 주부 김인숙(49·가명)씨는 내집 마련에 성공했다. 그러나 아이들 교육비는 물론 비싼 물가 때문에 걱정이다. “얼마 장을 보지 않았는데도 금방 10만원이 넘어간다”는 김씨. 실제 우리나라 소비자물가지수는 미국보다도 높다.
월수입 350만원 중 생활비로 100만원을 지출하는 김씨는 대학생 2명과 고등학생 자녀를 두고 있다. 통신비 20만원, 가족 보험료 등을 제외한 나머지 돈은 대부분 아이들의 교육비로 들어간다. “월급은 오르지 않는데 교육비는 늘어만 가고 물가는 비싸지기만 한다”고 말한 김씨는 외식비, 의복비, 경조사비 등을 줄인 지 오래다. 지출이 많다 보니 노후준비 역시 하지 못한다. 김씨는 “국민연금 외에는 적금도 들 수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인생의 황금기일 줄 알았던 40대. 경제적 안정을 누릴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치솟는 전세금, 사교육비, 높은 물가로 인해 지갑을 열지 못한다.
이날 숙대 앞 한 개인카페에서 점주 이석준(62·가명)씨를 만났다. 그는 “2007년 은퇴 후 창업 당시 3~4개이던 대형 프랜차이즈 카페가 현재 4배 이상 늘었다”며 “버티기 힘들다”고 말했다. 중소형 프랜차이즈 매장도 부지기수로 생겼다. 그 사이 개인이 단 간판들은 1년을 넘기지 못하고 우수수 떨어졌다. 카페를 포함해 전국에서 영업 중인 음식점은 올해 2월을 기준으로 60만2000여개에 달한다. 국민 80명당 한 명꼴이다. 심화된 경쟁은 수익에 직격탄을 날렸다.
경기도 군포시의 한 뼈해장국집에서 만난 점주 정복남(64)씨는 “15년간 장사하면서 돈을 벌기는커녕 밥만 겨우 먹고 살았다”고 말했다. 실제로 한국외식산업연구원이 올해 초 실시한 조사에서 전국 한식업종의 월 평균 이익은 225만원으로 나타났다. 최저임금 5210원을 기준으로 경영주 가족의 임금(약 2인, 218만8200원)을 빼면 6만원밖에 남지 않는 금액이다.
정씨는 “2002년 1㎏당 800원이었던 돼지뼈가 현재 3200원으로 4배 올랐다”며 “올해 초 비용 압박을 견디지 못해 지난 10년간 5000원이던 해장국 한 그릇 가격을 1000원 올렸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만큼 손님이 줄고 인건비도 올라 수익은 제자리다. 최근 정씨는 마지막 자존심으로 지키던 ‘김치-한국산’ 푯말을 ‘중국산’으로 바꿔달았다.
이 와중에 부가세마저 급등해 어려움은 더 커졌다. 경기도 안양시에서 한식점을 하는 김철준(55)씨는 “경기도 좋지 않은데 정부가 재료비에 ‘부가세 폭탄’을 터뜨렸다”고 분개했다. 기존에 정부는 농수축산물 구입비용의 약 7.4%에 해당하는 금액을 매출세액에서 공제해줬는데 올해부터는 음식점 매출 규모에 따라 공제 한도가 차등 설정됐다는 것. 한국외식업중앙회에 따르면 전체 업소들이 납부한 부가가치세는 제도 직전 대비 62.7~103.7% 수준으로 상승했다.
김씨는 “번 돈은 줄었는데 세금은 더 내라니 억울하다”며 “푸드트럭 등 엉뚱한 규제완화가 아닌 실질적인 세제 혜택이 필요하다”고 목소리를 높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