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1년 한국 야구판엔 엇갈린 운명을 타고난 두 남자가 있었다.
A는 당대 최고의 투수로 패배란 걸 몰랐다. 1986년 0.99, 1987년 0.89라는 전대미문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하며 ‘해태왕조’의 선봉에 선 선동열이다. 선동열은 그해 19승 4패, 평균자책점 1.55를 기록하며 다승ㆍ탈삼진ㆍ평균자책점 부문 타이틀을 휩쓸었다. 해태는 선동열이라는 특급 마운드를 등에 업고 정규리그 우승(79승 42패 5무ㆍ승률 0.647)과 6번째 한국시리즈를 제패했다.
반면 B는 만년 하위팀의 1할대 타자였다. 당시 태평양 돌핀스에 신인으로 입단한 그는 타율 0.175(99경기)라는 저조한 기록만 남긴 채 시즌을 마감했다. 팀 성적도 55승 69패 2무(승률 0.444)로 5위에 머물렀다. 존재감 없이 데뷔 첫해를 보낸 그는 넥센 히어로즈 감독 염경엽이다.
선동열과 염경엽은 광주일고와 고려대를 나온 선후배지만 프로 세계에선 시작부터 많이 달랐다. 그러나 23년이 지난 지금 둘 사이엔 믿기 힘든 반전이 일어났다. 두 사람은 각각 다른 루트로 KIA 타이거즈와 넥센 히어로즈의 감독이 됐다.
한국과 일본에서 명성을 날린 선동열은 고향인 광주로 돌아가 KIA 타이거즈의 수장이 됐다. 그러나 54승 74패(승률 0.422ㆍ8위)라는 초라한 성적표를 받아든 선동열은 스스로 감독직에서 물러났다.
각고의 노력 끝에 넥센 지휘봉을 잡은 염경엽은 78승 48패 2무(0.619)로 정규시즌 2위, 한국시리즈 준우승을 차지하며 팀 창단 7년 만에 최고 성적을 올렸다. 대부분 방출되거나 신고 선수들로 꾸려진 팀이었기에 놀라움은 더했다.
염경엽은 1991년 프로데뷔 이후에도 선수로서 이렇다 할 활약을 보이지 못했다. 데뷔 후 5년 간 평균 타율은 0.195로 2할도 넘지 못했다. 태평양 돌핀스에서 현대 유니콘스로 옮겨 선수생활을 이어갔지만 그의 야구인생은 결국 실패였다.
은퇴 후는 더 굴욕적이었다. 현대에서 은퇴한 뒤 코칭스태프가 아닌 구단 프런트 일을 맡았다. 그것도 운영팀의 말단 대리였다. 같은 시기 선동열은 일본 주니치 드랜건스와 삼성 라이온즈에서 지도자 수업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염경엽은 좌절하지 않았다. 돌파구를 찾기 위해 누구보다 열심히 분석하고 메모하고 공부했다. 선수로서 부족했다는 것을 인정하고 더 노력했다. 야구 관련 외국 서적을 번역해 읽었고, 감독과 코치들의 말을 한마디도 놓치지 않기 위해 메모를 생활화했다.
그렇게 눈물겨운 시간이 흘러 2014년. 염경엽 감독은 시즌 초반부터 기적의 드라마를 써내려갔다. 그리고 그간의 역경과 노력을 한줄기 뜨거운 눈물로 풀어냈다.
언제부턴가 한국 스포츠엔 스타 감독 영입이라는 트렌드가 생겼다. 하지만 염경엽은 간절함이라는 무기로 강팀들을 모조리 무너트렸다. 방출·신고 선수도 뜨거운 열정만 살아 있다면 기적은 늘 존재한다는 것을 입증했다. 그의 뜨거운 눈물이 한국 스포츠사에 한 획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