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철 논설실장
구체적인 지록위마의 사례로 무엇을 꼽을 수 있을까? 감은 온다. 하지만 누리꾼이 더 민첩하다.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놓은 지록위마 시리즈까지 돌고 있다. 시시비비는 있겠지만, 대체적 민심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그대로 옮기면 이렇다.
“1. 정치개입은 했지만, 선거개입은 아니다 -원세훈 판결
2. 56조원 빚 남겼지만, 실패한 자원외교 아니다 - 최경환 부총리
3. 내리라고는 했지만, 비행기 돌리라고는 안 했다- ‘땅콩’항공
4. (세월호 보도와 관련해) KBS에 언론보도 협조요청은 했지만, 언론통제는 아니다 - 청와대
5. 세월호 참사는 기본적으로 교통사고다 - 주호영 새누리당 정책위 의장
6. 담뱃값 인상, 국민 건강 위해서다 - 최경환 부총리
7. 공문서 위조는 했지만, 간첩조작은 아니다 - 서울시 공무원 간첩사건 수사검사
8. 유출된 문건이 청와대 문건은 맞지만, ‘찌라시’다 - 청와대
9. 전시작전권 (반환)은 연기했지만, 군사주권은 포기하지 않았다 - 국방부 장관
10. 원전은 해킹당했지만, 원전은 안전하다 - 한수원”
편파적으로 비칠 수도 있다.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의 땅콩회항 사건을 제외하면 모두 청와대와 정부 등 여권의 케이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비슷한 말인 견강부회(牽强附會·갖다 붙이기)나 아전인수(我田引水·내 논에 물 대기)와 달리 지록위마는 약자를 겁박하는 권력형 고사인 만큼 ‘슈퍼갑’에 질타가 쏠리기 마련이다. 한 술 더떠 새정치민주연합은 땅콩회항을 빼고 대신 통일진보당 해산을 집어넣는 등 지록위마 시리즈 변형안을 자체안으로 발표하기도 했다.
그렇다고 또 다른 갑인 야권이 자유롭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대리기사 폭행사건에 연루된 김현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의 “나 안 때렸어요”라는 변명이나 “전쟁을 준비하자는 게 아니라 민족공멸을 막기 위해 반전을 준비하자는 화두를 제시한 것이다”는 이석기 전 통합진보당 의원의 최후 진술도 지록위마처럼 본말이 전도돼 큰 공분을 샀다. “나 때문에 처남이 특혜를 입었다면”이라는 문희상 새정치민주연합 비상대책위원장의 ‘라면’ 사과도 진실을 호도했다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정치권만 물든 것은 아니다. 귀를 의심할 정도의 거친 폭언을 ‘나는 정치적 희생양’이라며 다른 곳을 가리켰던 박현정 서울시립교향악단 대표나 북한을 지상 천국인 양 선전하는 두 여성의 어처구니없는 평양 방문기에 이르기까지 시도 때도 없이 곳곳에서 넘쳐났다. 어쩌면 우리 사회의 수많은 ‘미생’에겐 이마저 사치일지도 모른다. 일상이 돼 버린 지록위마식 횡포에도 견뎌야 하기에 분루를 삼킨 채 엎드려 숨죽이고 있기 때문이다.
교수신문은 연초에 희망의 화두를 제시하고, 연말에 세태를 콕 집어 풍자한다. 올초 사자성어는 전미개오(轉迷開悟)였다. 번뇌에서 벗어나 열반의 깨달음에 이른다는 전미개오가 거짓이 판치는 지록위마로 쪼그라든 것이다. 지난해도 그랬다. 박근혜 정부 출범에 맞춰 내놓은 ‘묵은 것을 제거하고 새로운 것을 펼쳐낸다’는 제구포신(除舊布新)의 새해 메시지는 ‘순리를 거슬러 행동한다’는 도행역시(倒行逆施)로 추락했다.
2015년 새해는 어떨까. 글쎄다. 각자 편한 방향으로 해석할 뿐 자성의 목소리조차 없기 때문이다. 진보진영은 세월호 참사와 비선실세 국정개입 의혹에 대해 정부가 본질을 호도하고 있다는 의미로 지록위마를 언급하고 있다. 반면 보수진영은 야권이 허무맹랑한 의혹을 제기해 국정운영의 발목을 잡는 지록위마 행태를 보였다고 반박하고 있다. 진영 논리가 지록위마의 교훈마저 집어삼키고 있는 것이다.
내일은 성탄절이다. 이대로라면 산타클로스의 루돌프 사슴마저 말이 될 지경이다. 을미년에는 어떤 사자성어가 새해 메시지가 될지 궁금하다. 설마라도지록위마에 1위 자리를 내준 삭족적리(削足適履ㆍ발을 깎아 신발에 맞춤)란 섬뜩한 말이 득세하는 일은 없어야 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