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챔피언벨트를 잘 지켜줘서 고맙다.” 선한 미소를 띤 청년이 말했다. 하지만 그의 말엔 독기가 서려 있었다. 분노였다. 그의 보이지 않는 분노가 기자회견장을 싸늘하게 만들었다.
1992년 11월 일본 오사카 부립경기장에서 열린 세계권투협회(WBA) 주니어플라이급(-49㎏) 챔피언 이오카 히로키(일본)의 2차 방어전에 앞선 기자회견장 풍경이다. 도전자는 유명우(당시 28세)다.
유명우에게 이오카는 평생을 두고 잊지 못할 상대다. 그의 프로복싱 인생에 유일한 패배를 안겼기 때문이다. 그 1패의 아픔은 지금도 쓰린 상처로 남아 있다. 1985년 조이 올리보(미국)를 누르고 세계챔피언에 오른 이후 6년간 17차 방어전에 성공한 유명우다. 무엇보다 1982년 프로데뷔 이래 36차례의 경기를 모두 승리로 장식했다. 이오카를 만나기 전까지는 그랬다.
유명우는 1991년 12월 일본 오사카에서 열린 이오카와의 18차 방어전에서 우세한 경기를 펼치고도 심판의 석연찮은 판정으로 패했다. 뜻밖의 패배는 유명우에게 큰 시련을 안겼다.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그렇게 5개월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하지만 어느 순간 그의 주먹엔 다시 글러브가 끼워졌다. 이제 목표는 분명했다.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억누르며 복수의 칼을 갈았다.
그리고 336일 뒤 기다리던 리턴매치가 열렸다. 이번에도 적지다. 완벽하게 이기지 않으면 승리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날 유명우는 링 위에서 죽겠다는 각오로 경기에 임했다. 36분간의 피비린내 나는 승부가 끝이 났을 때 유명우의 눈두덩은 터져 있었다. 그러나 이오카의 얼굴은 만신창이가 됐다. 심판 전원일치 판정승. 누구도 유명우의 승리에 이견을 달지 않았다.
이후 유명우는 한 차례의 방어전을 치른 뒤 챔피언벨트를 자진 반납, 영원한 챔피언으로서 명예롭게 은퇴했다. 비록 1패라는 오점을 남겼지만 전화위복으로 삼았다. 당시의 시련은 은퇴 후에도 초심을 잃지 않는 원동력이 됐기 때문이다.
사실 그는 아마추어 시절 누구도 알아주지 않던 무명 복서였다. 서울 한강중학교 재학 시절 복싱에 입문해 아마추어 통산 전적 1승 3패라는 보잘 것 없는 성적만을 남겼다. 하지만 그의 복싱에 대한 열정과 도전정신, 그리고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성실성이 위대한 복서로 만들었다. 프로통산 전적 39전 38승(14KO) 1패. 그의 놀라운 성실성은 기록이 입증한다.
1993년 은퇴 후 22년이 지난 지금도 그를 위대한 복서로 기억할 수 있는 원동력은 변하지 않은 성실성과 겸손함 때문이다. 그는 은퇴 후 예식장 사업에 뛰어들었고, 24시간 설렁탕과 오리고기전문점을 차례로 경영하며 성공한 사업가가 됐다. 은퇴와 동시에 챔피언이 아닌 고기 굽는 평범한 아저씨로 돌아갔고, 그 일상에서 최고가 되기 위해 또 다시 놀라운 성실성을 발휘했다.
여자복싱 세계 11개 기구 통합 챔피언 김주희(29ㆍ거인체육관)의 스승인 정문호 관장은 “한국에선 다시는 나올 수 없는 선수”라고 극찬했다. 그럼에도 그는 “나는 행운아였다”고 말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