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경찰청장·충남지사·3選 의원 거쳐… 세월호법 등 고비 때마다 협상력 발휘
“대통령께 쓴소리와 직언을 하는 총리가 되겠다.”
국무총리로 지명된 직후 이완구 당시 새누리당 원내대표는 “야당과 소통하고 대통령께 직언하는 총리가 필요하다”며 “대통령께 직언하지 못하는 총리는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정치권도 이 전 원내대표의 총리 지명에 환영하는 분위기였다. 여당은 물론 야당도 이 전 원내대표의 총리 내정에 대해 이미 정치력은 검증된 것 아니냐며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총리 후보자에서 총리로 가기까지 그 길은 험난했다. 인사청문회 과정에서 각종 의혹 제기로 도덕성에 타격을 입은 가운데 인준 과정에서도 반대표가 나온 탓이다. ‘준비된 총리’라는 평가와 달리 인사청문회 과정에서 언론관, 부동산 투기, 병역, 논문표절, 가족의 건강보험료 미납 등 각종 의혹이 제기됐다.
특히 언론사 외압 발언으로 여론은 더욱 악화됐다. 여당의 표결 강행으로 총리 인준은 통과했지만 그 과정에서 이탈표가 7표나 생겨 이 총리는 물론 새누리당 원내 지도부의 리더십에도 상처를 입었다.
지명 직후만 해도 이 총리에 대한 긍정적 반응은 그가 지금까지 걸어온 남다른 이력과 정치적 자산 때문이었다.
여야가 극한으로 치닫던 세월호 정국 때 이 총리는 특유의 친화력으로 야당을 설득해 합의를 이끌어냈다. 이 총리는 협상 과정에서 실리도 챙겼다. 새누리당의 당론대로 상설특검법에 따라 ‘특검’을 추천해야 한다는 입장과 함께 유가족이 특검 추천 과정에 참여하는 것은 추후 다시 논의하기로 하면서 사실상 유가족의 참여를 막은 것이다.
원내대표직을 던지는 등 위기 국면에서는 정면 돌파도 자처했다. 그는 정의화 국회의장이 본회에서 안건 상정을 거부하자 사퇴를 표명하기도 했다.
이 총리의 정면 돌파 스타일은 세종시 수정안에 반대하면서 단식 투쟁을 벌였을 때 두드러졌다. 그는 끝까지 원안을 고수하다가 결국 도지사직까지 사퇴했다. 정치권 관계자들에 따르면 이때부터 이 총리는 박근혜 대통령의 확고한 신임을 얻은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이 총리는 8개월 만에 정치현장에 복귀하는 자리에서 자신이 도지사직을 버릴 수밖에 없었던 이유에 대해 ‘충청권의 자존심을 살리기 위해서’라고 주장했다.
그는 김대중·김종필·박태준의 DJP연합을 거론하며 “당시 DJP 연합으로 김대중 대통령은 당선됐지만 내각제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며 “세종시 수정안에 대해서도 그때처럼 침묵했다면 얼마나 충청도를 우습게 생각하겠는가”라고 했다. 결국 이 총리는 도지사 사퇴로 충청권 맹주로 발돋움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도지사 사퇴 이전까지 이 총리는 ‘최연소’라는 타이틀을 보유한 유능한 공직자라는 평가가 지배적이었다. 1950년생인 그는 1974년 제15회 행정고등고시에 합격한 이후 홍성군청에서 첫 공직생활을 시작했다. 이듬해 현역으로 육군에 입대했으나 신체검사에서 1년짜리 보충역 소집 판정을 받아 귀향 조치됐다. 그는 평발 변형을 불러오는 ‘부주상골’ 때문이라고 주장했지만 병역 기피 의혹은 청문회에서도 꼬리표처럼 따라다녔다. 이 총리는 이후 경제기획원 사무관을 맡아 ‘제4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 수립에 참여하기도 했다.
그는 사무관으로 근무하다 활동적인 일이 자신의 적성에 맞다고 결심한 뒤 경찰로 전직하고서 1980년 경정 계급으로 국가보위비상대책위(국보위) 내무위원회로 파견됐다. 이 총리는 이듬해 31살의 나이에 홍성경찰서장을 맡았고 이후 1990년대에는 충북 지방경찰청장과 충남 지방경찰청장을 지냈다. 그는 경찰에 재직하면서 최연소 경찰서장과 경무관 승진 기록을 세웠다.
치밀하고 일 욕심이 많은 것으로 유명해진 이 총리는 김영삼 전 대통령의 눈에 띄어 1996년 신한국당으로 출마해 15대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당시 대전·충남지역에서 신한국당 후보로 당선된 것은 이 총리가 유일했다. 매사 꼼꼼하고 치밀한 성격대로 그는 의원 시절 지역구민들에게 하루 100여통 이상의 전화를 했다. 초선의원으로는 드물게 당 대표 비서실장에도 발탁된 그는 1998년 탈당, 자민련에 합류했다.
16대 총선에서 자민련 간판으로 출마해 재선에 성공한 뒤 당 대변인과 원내총무 등을 맡아 활약했다. 그러나 그는 2002년 대선을 앞두고 자민련을 탈당해 이적하는 과정에서 정치 철새 시비에 휘말려 17대 총선에 불출마를 선언하고 미국으로 건너가 UCLA대 교환교수로 1년여를 보냈다.
이 총리는 2006년 지방선거에서 한나라당의 공천을 받아 충남도지사에 당선됐지만 결국 세종시 수정안에 반발해 도지사직을 내던졌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이 총리는 혈액암의 일종인 다발성 골수종 판정을 받아 6개월간 입원했고 스무하루 동안은 무균실에 들어가 조혈모 이식수술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이 총리는 완치가 어려울 것이라는 예상을 깨고 10개월 만에 완치해 2013년 4·24 재보선에서 77.4%의 압도적인 득표율로 19대 국회에 입성했다.
이 총리는 우여곡절 끝에 총리 인준 절차를 통과했지만 그 과정에서 충남에서의 자신의 정치적 영향력을 재확인하기도 했다. 청문회 당시 이 총리의 지명을 두고 부적절하다는 의견이 적절하다는 의견보다 많았지만 충청도에서만큼은 찬성 여론이 반대 여론보다 2배 이상 높았다. 상처로 남은 총리 인준 절차였지만 동시에 충청권 맹주로서의 자리매김을 다시 한번 하는 순간이었다.
<약력>
△1950년 충남 청양 △성균관대 행정학 학사 △미시간주립대학교 대학원 형사정책학 석사 △단국대학교 대학원 행정학 박사 △제15회 행정고등고시 합격 △홍성경찰서장 미국LA 한국총영사관 내무영사 △충북·충남 지방경찰청장 △제15대 신한국당 의원 △16대 자유민주연합 의원 △미국 캘리포니아 대학교 로스앤젤레스교 교환교수 △제35대 충청남도 도지사(한나라당) △제19대 새누리당 의원 △새누리당 원내대표 △국무총리
박상영 기자 sypar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