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배구조 투명한 기업이 안정적 성장 가능해
지난해 하반기 국내 시장투자자들에게 찬물을 끼얹은 사건이 있었다. 바로 현대자동차그룹의 10조원 규모 한전부지 매입이다. 입찰가의 3배 이상 되는 금액으로 부지를 매입하면서 주주들의 원성이 높아졌고, 일부 기관투자자들은 배임 아니냐며 반발을 하고 나섰다. 최근 열리고 있는 주주총회에서도 여러 기관투자가들이 한전부지 매입을 문제삼아 공개적으로 안건에 반대의사를 표시하고 있을 정도다.
주가도 반응했다. 현대차 주가는 지난해 상반기 23만원대에서 움직였으나 지난해 9월 한전 부지 매입 소식이 전해진 후 최저 15만원대까지 내려갔으며, 이후 배당확대 등으로 겨우 만회해 현재 17만원선을 회복한 상황이다.
오너의 뚝심(?)있는 결정으로 수조원에 이르는 시가총액이 한 순간에 사라진 것이다. 시장에서는 정몽구 현대자동차그룹 회장이 현대차 보유 주식수가 많았다면 10조원을 통크게 던졌을 것인지 의문부호를 제기하고 있다. 결국 기업지배구조가 기업의 의사결정과 무관하지 않음을 시사하고 있는 것이다.
◇‘정몽구 회장이 현대차 주식을 많이 보유하고 있었다면…’= 정몽구 회장은 현재 5.17%의 현대차 지분을 소유하고 있다. 대기업집단 2위의 그룹을 운영하는 총수치고는 주력 회사에 대한 지분이 많지 않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정 회장의 현대차 지분이 많았다면 10조원 투자가 가능했을까? 명확한 정답은 없다. 어차피 투자결정의 내면은 정몽구 회장만이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외부의 객관적인 시선들은 달리 해석하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우선 주주는 자신이 보유한 지분만큼 기업을 소유하고 있다. 즉 정몽구 회장도 5.17%만 소유하고 있다는 이야기다. 정 회장이 투자한 10조원도 사실은 현대차, 그리고 현대차와 함께 한전 부지를 매입할 현대모비스, 기아차 주주들의 재산이다. 즉 정 회장 개인 재산은 아닌 것이다.
결국 10조원 부지매입에 따라 현대차에 리스크가 따른다고 해도 정몽구 회장의 손실은 5.17%에 한정되는 것이다.
물론 한전부지 매입에 대해서는 반대의견도 존재한다. 당장 10조원이 커보이지만 그 투자로 인해 한전부지에 세워질 새로운 현대차 사옥의 가치, 그리고 여기에서 파생되는 부가가치는 충분히 10조원을 상쇄할 수 있다는 것이 그것이다.
문제는 이처럼 리스크가 큰 결정이 5.17% 지분을 가진 총수에 의해 이뤄진다는 점이다. 투자 관점에서는 큰 리스크라는 게 투자업계의 다수 의견이다. 이 때문에 올해 현대차 주총을 앞두고 브레인자산운용 등은 주주이익을 지키지 못했다는 이유로 윤갑한 사장의 재선임에 반대하는 의견을 제출하기도 했다. 물론 표대결에서 관철시키지는 못했지만 장차 현대차를 바라보는 투자자들의 시각에 변화가 있을 것임을 예고하는 대목이다.
현대차도 일부 태도 변화를 보이기도 했다. 지난 13일 열린 현대차 주주총회에서는 투자자가 경영진이 주주들에게 이로운 판단을 내리는지 감시할 수 있는 거버넌스위원회 설치가 필요하다는 주장이 제기했으며, 현대차는 ‘주주권익보호위원회(가칭)’를 구성하기로 결정했다.
◇‘땅콩회황’ 사태도 결국엔 기업지배구조 문제 = 지난해 국내에서는 현대차 10조 부지매입을 비롯해 KB사태, 제일모직 상장, 땅콩회황 등 여러 형태의 오너 및 경영진의 리스크가 분출했다.
특히 뜨거운 논란을 일으킨 대한항공 조현아 전 부사장의 ‘땅콩회항’ 사건도 지배구조 문제에서 파생됐다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한국기업지배구조원 송민경 연구위원은 대한항공의 위기대응은 물론이고 경영승계 시스템의 총체적 부실을 드러냈다고 평가했다. 오너 리스크 대응, 최고경영자 및 경영 승계를 책임있게 추진할 회사 내부 기구의 부존재, 정관ㆍ이사회 규정에서도 경영 승계와 관련한 권한과 책임 소재는 확인할 수 없었다고 지적한다. 사외이사의 독립성 훼손은 부차적일 정도다.
사실상 오너 행세를 했던 조현아 전 부사장의 경우 대한항공 지분율이 2.5%에 불과하다. 그러나 2.5% 지분을 가진 한 사람의 행위로 인해 대한항공과 한진그룹 계열사가 입은 손실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크다. 일반 투자자들 입장에서 지배구조가 투명한지 여부가 왜 중요한지 드러나는 대목이다.
그래서 삼성그룹의 제일모직 상장은 기업지배구조 측면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 그룹의 실질적인 지주회사가 상장기업이 되면서 기존 오너일가 중심의 폐쇄성을 허물었다는 것이다.
반면 삼성그룹의 전반적인 지배구조 투명성과 관련해서는 일부 문제점도 제기되고 있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입원한 뒤 삼성 일가가 삼성 SDS를 상장하고, 삼성SDI와 제일모직을 합병하는 등 지배구조에 많은 변화를 줬음에도 지배구조 변환과 관련된 개별 딜이 어떻게 주주들의 이익에 부합하는지 삼성그룹이 제대로 설명하지 않았다는 점을 꼬집었다. 주주 및 이해관계자에게 충분한 정보가 제공되지 않은 것은 지배구조의 투명성 차원에서 개선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더불어 금융회사의 지배구조 이슈도 최근 뜨겁게 논의되고 있다. 지난해 주전산기 교체를 놓고 KB금융지주 경영진과 KB국민은행 사외이사 간에 내분이 일어난 KB사태는 근본적으로 금융지주사 지배구조 개선 문제와 연결된다. 금융지주사와 계열사간의 역할 정립, 금융지주사 회장의 절대 권력 제한, 최고경영자와 사외이사의 자격요건 및 보수 제한 등에 대한 문제들이다. 이는 금융업계에 자리잡은 금융계열사의 낙하산 관료 인사문화와 금융지주사의 제왕적 오너 경영형태가 촉발시킨 문제다.
이는 KB 뿐만 아니라 신한, 우리 등 다른 금융지주사에도 존재하는 문제다. 지난해 금융위원회는 이러한 고질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금융사 지배구조 모범규준’을 발표했다. 지난 2월 KB금융지주 이사회는 ‘지배구조 개선 TFT 추진 결과’를 최종 보고 받고 ‘지배구조개선 방안’을 확정했다. 아직 실효성을 가늠할 수 없지만 금융회사의 내실경영에 대한 필요성을 인식하고 있음을 방증한다.
일련의 사태때문인지 최근 들어 투자자들도 지배구조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다. 물론 아직까지는 기업지배구조를 제대로 살펴보고 주주와 이해관계자의 이익을 우선시하고 있는지, 기업 운영을 투명하게 하는지 등을 고려해 투자하는 경향은 강하지 않다. 상당수 투자자들은 여전히 기업지배구조를 오너와 계열사간의 소유관계에 한정해 인식하고 있다.
하지만 투자업계 전문가들은 기업지배구조가 투명해질수록 주주들의 이익이 높아질 수 있다고 보고 있다. 따라서 투자자들이 지배구조에 관심을 가질수록 기업도 투명해지고, 이는 주주들 뿐만 아니라 장기적으로는 오너 일가의 이익에도 도움이 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