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가락 시인 이흥렬씨의 시 ‘앉은뱅이 꽃’이다. 뇌병변으로 몸이 마비된 시인은 왼쪽 발가락에 연필을 끼워 시를 쓴다.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게 오로지 발가락뿐이기 때문이다. 글쓰기를 정식으로 배운 적이 없어 매끄럽지 못한 표현도 간혹 눈에 띄지만 진심을 담아 쓴 시는 많은 이들에게 진한 감동과 용기를 선사한다.
봄비가 백곡(百穀)을 기름지게 한다는 절기 곡우(穀雨)이자 장애인의 날이었던 20일 여의도에서 우연히 만난 영화계 지인으로부터 이흥렬 시인에 관한 소식을 들었다. 시인의 삶을 소재로 한 영화 ‘앉은뱅이 꽃’(1997년)의 후속편이 이달 촬영에 들어가 올해 안에 시사회가 열릴 것이란 이야기였다.
영화가 흥행에 성공해 시인의 꿈인 중증장애인이 모여 예술활동을 하는 마을공동체가 만들어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리고 또 하나. 장애인 관련 공공 정책과 국민적 인식 등이 더욱 개선됐으면 한다. 그러려면 장애인에 대한 지칭 문제부터 해결해야 할 것이다. 언론, 방송에서조차 장애우, 장애자 등의 명칭을 마구잡이로 사용하며 국민들에게 혼란을 주고 있다.
‘장애우’라는 말이 등장한 건 불과 몇 년 전이다. 벗 우(友)자를 써 ‘장애를 가진 친구’란 의미를 담고 있다. 언뜻 친근하게 느껴질 수 있지만 사실은 문제가 많은 말이다. 장애인을 비사회적 집단으로 표현했기 때문이다. 문제의 핵심은 바로 벗 우자다. 먼저 인칭의 문제로 접근해 보자. 사회집단이나 계층을 말할 때 사용하는 말은 1인칭, 2인칭, 3인칭 모두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 여자·남자·사회인·노동자 등의 예처럼 말이다. 그런데 ‘장애우’는 타인이 나(장애인)를 지칭할 때에는 쓸 수 있지만 내(장애인)가 나를 지칭할 때에는 절대 쓸 수가 없다. 즉, 1인칭으로는 못 쓰는 말이다. 나 자신을 친구라 할 수는 없지 않은가. 이처럼 ‘장애우’는 장애인 스스로가 자신을 지칭할 수 없으므로 ‘비주체적인 인간’이란 의미를 담고 있다.
게다가 ‘장애우’는 일상의 예의에도 크게 벗어난 표현이다. 20·30대 젊은층이 장애를 가진 60·70대 어르신을 ‘친구’라 부른다고 생각해 보자. 이보다 더 버릇없는 일이 있을까.
보건복지부와 장애인 관련단체들은 장애우와 더불어 장애자란 말도 쓰지 말 것을 부탁한다. ‘장애자’에는 무능력한 사람이라는 편견이 스며 있어 왠지 비하하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따라서 장애를 지닌 사람은 ‘장애인’만이 올바른 표현이다. 그리고 장애인과 대립하는 말로 ‘정상인’을 쓰는 사람이 많은데, 이 역시 바람직하지 못한 표현이다. 장애인이 ‘비정상인’으로 여겨질 우려가 있어서다. 장애인과 대립되는 말은 ‘비장애인’이다.
최근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비서로 청각장애 여성이 발탁됐다. 그의 업무는 대통령 집무실 방문자들의 약속 여부를 확인하고 안내하는 것이다. 물론 그녀는 수화통역사의 도움을 받고 있다. 하지만 그녀가 능력을 발휘하는 데 장애가 걸림돌이 되진 않았다. 우리 사회도 장애인을 바라보는 시각과 고용 수준이 이 정도는 돼야 하지 않을까. 장애인을 평범한 이웃으로 여기고 배려해야 한다. 특히 정부는 장애인이 각 분야에서 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편의시설 등 사회적 인프라를 확대해 나가야 할 것이다. 장애인 당사자의 ‘하면 된다’라는 의지만으로 모든 걸 뛰어넘을 순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