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부 다이소아성산업 회장
무역업 시작하고 日서 첫 주문
품질 제대로 체크 못해 전량 반품
혹시 쉽게 가려는 마음 있었나
스스로를 되돌아보는 계기로
많은 사람들이 즐기면서 일하는 것을 꿈꾼다. 일을 즐기면서 하려면 먼저 자신이 하는 일에 자긍심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가 15년간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사업을 시작하면서 겪어온 과정은 결코 평탄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내가 하는 일에 자긍심이 있고 보람을 느끼고 있다. 그랬기 때문에 그 어려웠던 과정을 즐겁게 견뎌왔다고 말할 수 있다.
처음 한국에 균일가숍을 론칭했을 때 가게 문 앞에서 1000원짜리 제품을 쓸 수나 있겠느냐고 비웃으며 발을 돌려 나간 손님도 있었다. 또 여러 분야의 회장님들이 모이는 모임에서 1000원짜리 제품을 판매한다고 소개했다가 비웃음을 당한 적도 있다. 하지만 나는 누구보다 이 사업에 자긍심을 갖고 있다. 마진만 생각해서는 이 사업을 지속하기 어렵다. 지금은 매장에서 5000원짜리 ‘고가 제품’도 판매하고 있지만, 여전히 1000원, 2000원 상품이 다이소 제품의 약 80%를 차지한다.
적은 돈으로 사람들이 필요를 충족하고 즐거움까지 얻을 수 있다는 것이 이 사업을 하면서 얻는 가장 큰 보람이다. 나는 균일가를 지켜가는 이 일에 스스로 일종의 나눔을 실천한다는 가치를 부여하고 있다. 그래서 누가 뭐라고 하든지, 처음 시작부터 지금까지 값이 싸고 품질이 좋은 상품을 발굴하는 것을 사명으로 삼고 온 열정을 다해서 일하고 있다. 그래서 매년 중국, 동남아, 유럽, 러시아 등 전 세계를 누비면서 수백명의 제조업자를 만나고 또 이들과 ‘10원’, 심지어 ‘1원’ 깎기 싸움을 벌인다.
15년간 근무하던 직장을 그만두고 기업가로서의 새로운 길을 선택했던 1988년, 당시 내 나이는 불혹을 넘긴 45세였다. 나만의 사업을 꾸려가고 싶었지만, 처음부터 균일가숍을 염두에 두었던 것은 아니었다. 나의 첫 사업은 삼성, LG 등 국내 대기업 임직원의 일본연수와 세미나를 지원하는 일이었다. 그런데 본업보다 일본을 오가면서 우연히 접하게 된 무역 업무가 더 마음에 들었다. 사실 난 어린 시절에 무역상이 되겠다는 꿈이 있었다. 오랜 시간 회사원으로 지내면서 잊고 살았는데, 이 기회에 제대로 도전해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기업을 운영하려면 무엇보다 쉽게 하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특히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거나, 새로운 기회를 잡고자 하는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로켓이 지구의 중력을 이기고 대기권을 벗어나기 위해 엄청난 에너지가 먼저 필요하듯, 새로움을 뚫고 안정적인 단계에 이르기 전까지는 엄청난 노력과 의지가 필요하다. 이만한 노력과 의지가 필요하다고 인정하고 들어가야 사업 초반 미숙함 때문에 겪는 실패에도 좌절하지 않고 끝까지 사업을 끌어갈 수 있으며, 새로운 기회가 다가왔을 때 성공적으로 붙잡을 수 있는 법이다.
‘한일맨파워’로 무역 업무를 본격적으로 시작하면서 일본 업체를 닥치는 대로 찾아 다니며 납품을 의뢰했다. 하지만 꼼꼼하고 기준이 높은 일본 기업들에게 아마추어인 우리의 제안이 쉽게 받아들여질 리 만무했다. 퇴짜맞고 거절당하는 것을 일상으로 여기던 중, 우여곡절 끝에 일본 주류 도매업체와 첫 주문을 성사시켰다. 고객 사은품용 유리 재떨이 5000개였는데, 그때 느꼈던 짜릿한 성취감은 말로 표현할 수 없다.
이번 거래는 당연히 성공적으로 마무리될 것이고, 이를 발판 삼아 우리 앞에는 성장할 일만 남았다는 기대감에 부풀었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담뱃재의 열로 재떨이가 깨지는 결함이 발견되면서 주문 전량이 반품되었다. 가격경쟁력을 중시하다 품질을 제대로 체크하지 못한 것이 실수였다.
실수를 되짚어보며 나에게 쉽게 가려던 마음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는지 돌아보았다. 15년간 생산관리직에서 일해왔기에 품질은 어느 정도 판단할 수 있다고 여기는 마음이 실수를 불러왔구나 싶었다. 이후 나는 내 나름의 기준을 버리고 납품업체의 품질을 확인하는 데 더욱 각별한 주의를 기울였다. 그리고 가격과 품질 모두 만족스러운 제품을 찾기 위해 직접 발품을 팔며 노력했다.
균일가숍 전국에 1000여개
값 싸고 품질 좋은 상품 발굴
전세계 누비며 ‘1원 깎기’ 싸움
일종의 나눔 실천하는 가치도
1989년은 인생 최대 전환점이라 할 수 있다. 일본의 대표적인 100엔숍 업체인 다이소그룹을 소개받아 제품을 납품할 기회가 주어진 것이다. 당시 다이소 그룹 회장이었던 야노 회장은 꼼꼼하고 까다롭기로 유명했다. 그리고 품질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눈앞에서 가차없이 제품을 집어 던지는, 강한 캐릭터의 소유자였다. 나는 다이소산업과의 계약이 기회가 될 수 있다는 생각에 이번 거래를 반드시 성공적으로 마무리하겠다는 목표로 모든 에너지를 쏟았다.
하루 종일 신칸센을 타고 일본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면서 일본 시장을 파악했다. 잠은 일본 전역의 사우나에서 해결했다. 남들이 중국에서만 싼 제품을 찾을 때, 나는 조금 더 수고한다는 생각으로 동남아, 유럽, 러시아 등 세계 각지로 다니며 각 나라의 경쟁력 있는 제품을 찾았다. 처음 수십개의 상품을 들고 야노 회장 앞에 섰을 때는 긴장감으로 다리가 후들거렸다. 야노 회장의 입에서 ‘OK’라는 말이 나왔고, 한일맨파워는 그 까다롭기로 유명한 기업에 생활용품을 독점 공급하게 되었다. 일본 다이소산업과의 계약을 계기로 나는 일본의 100엔숍(우리나라의 1000원숍) 시장을 눈 여겨보기 시작했고, 결국 한국 1000원숍 오픈까지 이어지게 되었다.
일본의 100엔숍 시장은 내게 참 신기한 시장이었다. 일본 100엔숍은 70년대부터 시작되었는데, 우리나라보다 소득수준도 높고 꼼꼼한 국민성을 가진 일본인들에게 인기가 정말 많았다. 일본 100엔숍 시장을 분석하고, 일본의 대표적인 100엔숍인 다이소산업에 제품을 납품하며 그들의 경쟁력을 배우기 위해 노력했다. 체계적인 1000원숍 개념이 우리나라에서도 충분히 사업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하여 조금씩 1000원숍 오픈을 위한 준비를 시작했다. 매번 깐깐한 일본 다이소의 기준에 맞는 제품을 찾아다니다 보니 상품개발 능력과 품질관리 능력도 갖출 수 있었다.
일본 구매 고객의 취향을 맞추기 위해 일본 상품기획자를 다수 고용해 일본 문화에 맞는 상품을 개발하고 문구를 작성하였는데, 이러한 다양한 경험과 노하우는 한국의 대표 균일가숍 다이소를 운영하는 데도 크게 도움이 되었다. 나는 1992년 한국에 다이소아성산업을 설립했지만 5년간 철저하게 한국 시장조사를 하면서 때를 기다렸고, 1997년 ‘아스코이븐프라자’라는 이름으로 1000원숍을 오픈했다. 그리고 다이소는 3년 만에 매장 수 100개를 돌파하고, 지속적으로 성장하여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균일가숍으로 자리잡았다.
기업을 성공적으로 운영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며, 결정적인 순간마다 많은 노력과 의지가 필요하다. 하지만 이것보다 우선되어야 할 것은 내가 하는 일에 자긍심을 갖고 있느냐는 점이다. 이 자긍심이 힘든 일을 즐겁게 해 주고, 기업가가 초심을 변질시키지 않고 노력과 의지를 이끌어내는 원동력이 된다고 생각한다. 나는 1000원으로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선사할 수 있는 균일가 사업을 운영해오고 있다는 것이 자랑스럽고, 다이소를 방문하는 모든 사람이 가격 이상의 가치를 얻어가는 공간으로 만들고자 노력할 것이다. 이러한 자긍심이 70세를 넘은 지금도 1년의 절반 이상을 해외에서 보내며 발품을 팔게 하는 힘이다.
<이력>
1973년 2월 한양대학교 공업경영학 학사
1988년 한일맨파워 회장
1992년 다이소아성산업 회장
1993년 11월 ‘제30회 수출의 날’ 상공자원부 장관상
1997년 11월 ‘제43회 수출의 날’ 석탑산업훈장, 천만불 수출의 탑
1999년 8월 ‘이달의 무역인상’ 수상
2002년 11월 ‘제39회 무역의 날’ 철탑산업훈장, 1억불 수출의 탑
2003년 6월 생산성 경영자 대상
2008년 12월 ‘제45회 무역의 날’ 동탑산업훈장
2009년 12월 지경부/대한상의 주최 ‘대한민국 유통대상(국무총리상)’
2014년 10월 ‘제19회 한국유통대상 대통령상’ 수상
<주요 사회활동>
2006년~ 한국무역협회 전략운영위원장
2006년~ 한국무역협회 남북교역투자협의회 위원장
2012년~ 한국중견기업연합회 부회장
2013년~ 한국중견기업연합회 세제금융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