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혜훈 연세대 특임교수, 전 국회의원
지난 6월 25일 국민연금은 SK㈜와 SK C&C 합병을 반대했다. 합병비율 1대 0.73이 최 회장 등 총수 일가 지분이 많은 SK C&C의 가치는 높게 평가하는 반면 SK㈜의 가치는 낮게 평가함으로써 주주가치를 훼손한다는 이유였다. 그러나 불과 2주일 후 동일한 사안인 제일모직과 삼성물산의 합병에 대해서는 입장을 정반대로 바꿔 찬성했다.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비율 1대 0.35는 SK㈜와 SK C&C 합병비율보다 격차가 더 커 주식 저평가 문제가 훨씬 심각한 데도 SK 건에서는 주식 저평가 문제를 이유로 합병을 반대했던 국민연금이 삼성 건에서는 찬성했을 뿐 아니라 주총이 열리기 전에 찬성의사를 공개해 다른 주주들도 찬성표를 던지도록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또 다른 문제는 합병 이후 두 회사의 주가가 크게 하락하면서 국민연금의 손실액이 6000억원에 달하고 있을 뿐 아니라 국민연금은 합병 안에 찬성했기 때문에 주가가 하락해도 주식매수청구권행사를 통해 투자금을 보전할 수 없다는 점이다. 결과적으로 국민연금은 국민의 노후자금을 손해 보면서까지 이재용 삼성 부회장의 경영권 승계에 명분 없이 앞장섰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그런데 더 이해할 수 없는 행보는 롯데그룹에 대한 국민연금의 태도다. 최근 형제간, 부자간에 막장 드라마 같은 경영권 다툼을 벌이는 동안 롯데그룹의 8개 상장회사 주가는 1조5000억원이나 하락했다. 국민연금은 이들 회사에 5~13%의 지분을 가진 대주주로 상당한 손실이 예상되는데 국민연금의 손실은 곧 국민 노후자금의 손실이다. 대주주로서의 기본 권한을 행사해 손실 보전 대책 마련을 요구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런데 국민연금은 이런 일각의 요구를 경영 개입으로 오도하면서 연금사회주의의 우려가 있다고 거부했다.
첫째, 손실이 우려되는 상황에서 손실 보전 대책 마련을 요구하는 것은 기본적 주주의 권리일 뿐 경영 개입이 아니기 때문에 자본시장법상의 경영참여공시, 공동보유자신고, 단기매매이익반환 등이 적용되므로 곤란하다는 국민연금 측의 주장은 성립되지 않는다. 일례로, 지난해 현대차가 한전부지를 비싸게 매입했기 때문에 손해를 봤다고 주장하며 손실 보전을 요구한 홍콩 투자자들의 요구는 경영 개입이 아니라 기본적 주주로서의 정당한 권리 요구였기 때문에 자본시장법상의 상기한 제약들이 전혀 적용되지 않았다.
둘째, 국민연금이 국민의 노후자금 6000억원 평가손을 감수하면서까지 특정인의 경영승계 작업에 앞장섰다는 비판을 받고 있는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 건이 오히려 연금사회주의의 우려가 높은 사안이지, 롯데그룹 건처럼 국민의 노후자금의 손실 보전을 위해 국민연금이 기본적 책무인 손실 보전 대책 마련을 요구하는 것은 연금사회주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국민연금은 국민의 노후자금을 불리라고 만든 조직이다. 특정인의 황제경영을 방어하라고 만든 조직이 아니다. 주가 하락으로 국민의 노후자금 손실이 우려되면 당연히 보전 대책 마련을 국민이 요구하기 전에 국민연금이 먼저 요구하고 나서야 한다. 그런데 이미 홍콩 등 외국 투자자들은 다 받아내는 손실 보전을 적용되지도 않는 법 핑계를 대면서 못 한다고 버티는 국민연금은 도대체 누구를 위한 국민연금인가? 재벌을 위한 국민연금인가, 국민을 위한 국민연금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