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첫인상, 크다
솔직히 화면이 6.8인치인 걸 몰랐던 것도 아니고, 새삼스럽게 크다는 엄살을 늘어놓는 건 촌스러운 일이다. 마치 일본 그라비아 화보를 보며 “너무 헐벗은 거 아냐?”라고 내숭 떠는 것처럼. 그게 원래 그런 건데 말이지. 한 5.8인치 정도라면 “좀 큰데…”하고 볼멘소리를 할 수도 있겠지만, 6.8인치면 애초에 작정하고 크게 만들었다는 소리 아닌가. 큰 게 아이덴티티고 큰 게 존재의 이유인데, 크다는 이유로 폄훼할 순 없다.
자, 여자 손으로 한 손에 잡은 모습이다. 솔직히 실제로 보면 생각보다 더 크다. 그래도 대단한 건 한 손에 쥘 수 있는 최대 사이즈를 절묘하게 넘지 않았다는 것. 한 손으로 조작하긴 어려울지언정, 한 손으로 쥐고 있는 건 특별히 어렵지 않다. 아마 이것보다 조금만 더 컸어도 한 손에 들기 버거웠을 것이다. 미묘한 그 선을 잘 지켰다.
2. 지하철에 자리가 났으면 좋겠다
요즘은 출근길에 이런 생각을 한다. 지하철에 좌석에 앉은 사람들의 목에 “군자역에서 내립니다”라는 표지판이 걸려있는 상상을 말이다. 아침마다 꽉 찬 5호선 만원 지하철에서 손잡이를 잡고 앞사람의 관상을 살핀다. 저 얼굴은 여의도까지 갈 얼굴인가, 군자까지 갈 얼굴인가. 왜 이런 헛소리를 하냐면, 팹플러스를 사용하면 지하철에 서서 한 손으로 웹서핑을 하는 자유는 박탈 당하기 때문이다. 한 손으론 손잡이를 잡아야 하는데 남은 한 손으로 6.8인치를 조작하기란 무리다. 그래서 간절히 자리가 나길 바란다. 대신, 자리가 난다면 그때부턴 모든 일이 쾌적해진다. 무릎 위에 가방을 올려두고 두 손으로 널찍한 대화면을 마음껏 즐겨 보자. 아, 좋다!
아, 물론 한손 모드가 있다. 상당히 잘 만든 기능인데 화면에 대충 ‘C’를 그리면 전체 화면의 축소 버전이 나타난다. 자이로 센서를 이용해 한 손 모드 창의 위치를 바꿀 수도 있다. 왼손으로 잡고 쓰려고 한다면 살짝 왼쪽으로 기울이면 된다. 이 기능에 접근하는 방법은 상당히 잘 구현해놨지만, 아무리 스크린이 쪼그라들어도 이 제품을 한 손으로 조작하긴 어려워 보인다.
3. 쇼핑하기 좋은 폰이다
화면이 크다는 건 분명한 장점이다. 똑같은 웹툰을 봐도 더 시원스럽고, 동영상 보기 좋은 건 말할 필요도 없겠지. 원래 아이패드를 꼭 들고 다니는데, 팹플러스를 쓰는 동안은 따로 챙기지 않았다.
솔직히 내 입장에선 제일 좋은 건 모바일 쇼핑할 때다. 난 바쁘고 차가운 현대 도시 여성이라 출퇴근 때마다 짬짬이 틈을 내 쇼핑을 하곤 한다. 그런데 스마트폰의 작은 화면으론 ‘큰 결정(10만원 이상의 결제를 뜻한다)’을 내리기 어려울 때가 많다. 특히 의류나 신발 같은 경우엔 최저가를 찾아놓고도 몇 번이나 고민하다가 “아, 살까 말까? 이따가 PC화면으로 다시 보고 정해야지”하고 결정을 미루게 된다. 그런데 6.8인치 화면으로 쇼핑하니 그런 일이 없다.
일단 화면이 커져서 한 화면에 담기는 정보가 많아졌다. 상품 목록을 살펴볼 때, 4개의 제품만 보이던 것이 한 번에 6개의 제품이 보이니 훨씬 비교하기 쉽다. 화면이 커서 옷의 소재나 디테일을 살펴보기도 더 수월하다. 이건 모바일 쇼핑에 가장 완벽한 기기다. 일반 태블릿은 오히려 부담스럽다. 영상을 감상할 때처럼 거치대를 쓸 것도 아니고, 손에 쥐고 자유롭게 화면을 넘겨봐야 쇼핑하는 느낌이 사는데 6.8인치보다 크면 손에 쥐기 힘드니까. 카탈로그 넘기는 느낌으로 장바구니를 탭, 탭! 그래서 뭘 샀냐고? 별거 안 샀다. 브이넥 티셔츠 한 장과 부츠, 결혼식용 블라우스, 전기장판을 샀다. 모두 생필품이다. 으르릉.
4. 화면은 80점
처음엔 양옆 베젤이 너무 얇아서 감탄했는데, 전원을 켜고 나면 약간의 거짓(?) 베젤이었음을 알게 된다. 그래도 전면 디자인에 군더더기는 없다. 6.8인치에 풀HD 해상도로 화질은 기대 이상. 영상물을 볼 때도 특별히 몰입감을 해치지 않는 해상도였다.
테스트를 위해 자주 사용하는 리디북스 앱을 팹플러스에서 써봤다. 만화책도 보고, 소설책도 읽어 봤는데 나쁘지 않다. 화면도 널찍하고 글씨가 깨끗하고 선명하게 보여서 전자책 단말기로 잘 활용할 수 있었다. 적당한 사이즈 덕에 진짜 전자책 단말기와 비슷한 느낌이다.
디스플레이는 전체적으로 만족스럽다. 다만 약간 화면이 어둡다는 점이 아쉽다. 아이폰6s와 나란히 두고 봤을 때 최대 밝기의 차이가 크더라. 웹서핑할 때는 이 점이 아쉬운데, 전자책을 읽을 땐 오히려 장점이었다. 눈의 피로가 덜하다.
5. 사운드는 덤이 아니라 매력 포인트
레노버 측은 팹플러스에 ‘멀티미디어폰’이라는 독특한 네이밍을 시도했다. 그만큼 멀티미디어 감상에 최적화되어 있다는 뜻이다. 단순히 화면 크기만 내세운 것은 아니다. 사운드에 아주 공을 들였다. 돌비 애트모스 사운드가 적용됐다는데, 현장감 있는 입체 사운드를 제공한다고. 이를 강조하기 위해 후면 상단에 큼직한 사운드바도 마련해놨다.
솔직히 말하면, 사운드바로 듣는 것보다 이어폰을 꽂아 사용할 때의 음질이 훨씬 놀라웠다. 하이엔드 이어폰을 꽂아도 그 강점이나 공간감을 풍부하게 표현해주고, 그냥 애플 번들 이어폰을 꽂아도 좋다. 다른 스마트폰과 팹플러스로 번갈아가며 같은 유튜브 영상의 소리를 들어보았다. 막귀인 나도 실감할 만큼 소리가 다르다. 훨씬 더 소리가 가깝게 느껴지며, 중저음이 선명해졌다. 문제는 영상 소스가 안 좋은 경우 쓸데없는 잡음도 더 또렷해진다는 것. 어쨌든 좋은 컨텐츠를 감상할 때 훨씬 귀를 즐겁게 해주는 기기라는 건 확실하다. 후한 점수를 주고 싶다.
팹플러스에 데모로 담긴 영상의 소리를 들어보면 머리 주변을 한 바퀴 타고 도는 360도 입체 사운드를 경험할 수 있다. 오, 좋다.
6. 그러나 카메라는 덤
장점이 많았으니 안 좋은 점도 있겠지. 카메라는 덤으로 넣은 게 확실하다. 1300만 화소 후면 카메라를 탑재하긴 했는데, 선명도나 컬러표현 등이 썩 만족스럽지 않다. 물론 일상 기록용으론 충분할 것 같다. 요즘 스마트폰 카메라에 대한 기대치가 너무 높아져서 어지간한 사진으론 마음이 움직이지 않더라. 사진 몇 장을 찍어보았으니 슬쩍 감상해보시길.
다행인 건 전면 카메라로 셀카를 찍어보니 셀카는 잘 나온다는 거. 박수 짝짝짝. 이거면 됐다.
7. 중간은 하는 디자인
디자인 얘기를 뒤늦게 하는 것 같다. 혹자는 아이폰과 닮지 않았냐고 묻던데, 글쎄. 비슷한 경향이 없지 않아 있는 것 같지만… 옆동네 루나처럼 압도적으로 똑같이 생긴 경우도 있는데 굳이 얘를 잡을 필욘 없을 것 같다. 생김새는 무난하다. 원래 풀메탈 유니 바디 디자인은 중간 이상 하는 법이다. 크기에 비해선 두께도 나쁘지 않다. 두께 7.6mm에 무게 229g.
8. 존재의 의미
이제 좀 전체적인 얘길 해볼까. 일단 성능은 ‘적당하다’는 표현을 쓰고 싶다. 괜히 쓸데없는 기대를 품으면 실망할 것이고, 별 생각 없이 사용하면 모자람이 없다. 스냅드래곤 615를 탑재했으며 3D 게임도 무리 없이 구동되지만 그래픽이 미묘하게 흔들리는 걸 느낄 수 있다. 대신 사운드가 빵빵해서 게임 몰입도는 훌륭하다. 게임도 하고, 동영상도 보고, 화면을 한참 틀어 놓아도 뜨끈해지는 일은 없었다. 발열이 없다니… 날도 추운데 아쉽게 됐다.
배터리 용량은 3500mAh으로 사용 시간은 꽤 만족스러웠다. 듀얼 심을 지원하는데, 국내에선 활용도가 높지 않아 심 트레이 한 쪽에 마이크로 SD를 넣어 사용하는 것이 훨씬 유용하겠다. 기본 내장 메모리도 32GB로 나쁘지 않은데, 여기에 최대 64GB를 추가해 사용할 수 있다. 사소한 부분이지만 외산폰인데 통화 중 녹음 기능을 제공한다는 점도 인상적이다.
기기 자체는 요란하게 평가할 만큼 대단하지 않다. 하지만 39만 9000원이라는 산뜻한 가격에 이 정도 (커다란) 제품을 만져볼 수 있다는 것은 흐뭇한 일이 아닌가. 게다가 이동통신사를 거치지 않고 철저히 자급제폰으로만 유통하는 패기 역시 마음에 든다. 이통사의 보조금에 의지하지 않고 오픈마켓을 통해 판매하기 때문에, 소비자들은 위약금이나 이통사 선택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다. 사실 해외에선 이런 자급제 시장이 점차 커지고 있는 상황이지만, 한국 이통 시장이 워낙 복잡미묘특수한 만큼 단말기만 외따로 판매하는 것이 어려웠다. 그렇기 때문에 팹플러스의 모험에 더더욱 주목하게 되는 것이다. 많은 물량은 아니지만 이미 출시 하루 만에 11번가 매출 순위 1위를 달성하며 1차, 2차 판매 물량이 모두 소진됐다고 한다. 아직은 시장의 전환을 논할만한 숫자는 아니지만, 충분히 의미 있는 시작이다.
그래서인지 잡음도 들린다. 국내 판매하는 LTE 스마트폰은 국내 이동통신 3사의 LTE 서비스를 모두 지원해야 한다는 ‘LTE 유심 이동성’에 어긋난다는 것이다. 팹플러스는 VoLTE를 지원하지 않는 단말기라 SK텔레콤과 KT를 통해서는 개통할 수 있지만 LG유플러스에서는 개통할 수 없다. 때문에 전파인증을 다시 받아야 한다는 문제에 휩싸였다. 사실, 해외 제조사와 국내 제조사를 막론하고 저렴한 가격에 선택할 수 있는 제품이 늘어난다는 건 소비자 입장에서 긍정적인 일인데 제도의 벽에 부딪혔으니 난감할 따름이다. 무엇을 위한 유심 이동성인지 헷갈리는 상황. 어쨌든 이 문제는 더 지켜볼 일이다. 어여쁜 하니가 광고하는 팹플러스의 건투를 빌며, 이 리뷰는 여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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