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 8년 ‘역대최장’ 거래소 이사장…근대적 자본시장 ‘밑그림’
하지만 40여년 전의 주식시장은 극소수 투자자들이 좌지우지하는 소규모 투기시장에 불과했다. 지금은 유가증권시장과 코스닥을 합쳐 약 1500개 기업이 상장돼 있지만 과거에는 상장기업이 몇 개에 불과한 협소한 시장이었다.
주식시장이 실물경제의 자본조달 기능을 수행하기 시작한 것은 한국 자본시장이 큰 변혁을 겪은 1970년대 이후부터였다. 이 때문에 상당수 증권가 원로들은 근대적 자본시장의 밑바탕을 일궈낸 일등공신으로 1960년대(1964~65)와 1970년대(1971~77) 제10대, 제14대, 제15대 증권거래소 이사장을 지낸 고 김용갑 전 이사장(1919~2007)을 꼽는다.
◇ 서울대 교수·재무부 차관 경력…정부시책 호응 적임자=“증권이라면 모든 사람들이 슬슬 피하죠. 그러나 피한다고 될 일이 아닙니다. 부닥쳐야 해야. 한 번 몸으로 부닥쳐볼 작정입니다”. 당시 언론보도에 기록된 김 전 이사장의 1971년 취임 일성이다. 그만큼 증시는 혼탁했다. 어지간한 인사들은 거래소 이사장 자리를 부담스러워했다. 반면 증시개혁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잘 인식하고 있던 김 전 이사장은 사명감이 있었다.
1970년대 초반 정부는 경제개발계획을 추진하기 위한 투자재원이 절실했다. 증권시장 육성은 고민을 해결해 줄 수 있는 중요한 열쇠였다. 유명한 ‘사채동결조치’와 ‘기업공개촉진법’이 준비되고 있었다. 법률적 조치만으로는 충분치 않았다. 누군가 사채동결로 갈 곳을 잃은 유동자금이 주식시장으로 흘러들 수 있도록 실질적인 역할을 해야 했다.
정부는 김 전 이사장이 적임자라고 판단했다. 서울대 상대(경제학과 교수), 재무부 차관 등을 지낸 경력은 남덕우 당시 경제부총리와 여러 면에서 결이 맞았다. 한 차례 이사장을 지낸 경력도 있었다. 역대 거래소 이사장 가운데 김 전 이사장의 재임기간(총 8년)이 가장 길었다는 점은 그에 대한 정부의 신뢰를 보여준다.
김 전 이사장은 취임과 동시에 변혁을 추구했다. 우선 목표는 증권시장을 ‘대중화’ 하는 것이었다. 김 전 이사장은 신뢰를 강조하며 상장기업의 공시제도를 대폭 강화하는 한편, 2년간에 걸쳐 주식시장의 불공정거래 사례를 집대성했다. 주식시장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해소해야 투자자들이 들어올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또 정부의 유도책에도 불구하고 기업공개를 꺼리는 기업들을 찾아 상장을 적극적으로 독려했다. 일본에 직원을 파견해 해외 선진시장 벤치마킹을 시작한 것도 이 때였다.
격탁매매방식은 집단경쟁매매방식이라는 단점이 있었다. 몇몇 증권사 대표가 ‘짜고 치기에 좋은 형태다. 김 전 이사장은 육각형 모양의 단상(포스트)에서 개별경쟁매매가 이뤄지는 ‘포스트매매’에 방식을 도입했다. 거래소 관계자는 “그 당시는 증권사 사장들과 시장대리인이 거래소 직원 뒤에 서서 시장을 좌지우지할 때였다”면서 “김 전 이사장은 아예 이들을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 기득권을 뺏기지 않으려는 업자들의 반발이 컸지만 김 전 이사장의 신념이 더 강했다”고 말했다.
개혁에 불만을 가진 일부 큰손 투자자들이 투자금을 회수하기도 했지만 김 전 이사장의 손을 거친 증시는 괄목할 수준의 성장을 이뤘다. 70년 48개에 불과했던 상장사는 78년 356개사가 됐다. 주식거래대금 역시 이 기간에 429억원에서 1조7415억원으로 40.6배 불어났다. 증시성장에 힘입은 1973년 1분기 실질 국민총생산(GNP) 성장률이 전년 동기 대비 19%로 상승하는 등 실물경제 파급효과도 컸다.
증권업계 원로 강창희 토러스연금포럼 대표는 김 전 이사장에 대해 “굉장히 올곧은 신념이 있는 분이었고, 엘리트 출신답게 자본시장에 대한 이해가 있는 분이었다. 근대적 자본시장을 어떻게 만들어야 한다는 비전이 있었다”라며 “김 이사장의 개혁조치들로 증권시장이 실물경제와 유리된 ‘투기 시장’에서 실물 경제를 반영하는 기업자금 조달시장으로 바뀔 수 있었다”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