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가 무엇을 먹는지 말해보라. 그대가 어떤 사람인지 말해주겠다.”
프랑스의 대표 미식가 ‘브리야 사바랭’의 말입니다. 음식에 담긴 사회, 문화, 예술의 가치를 비유적으로 표현한 말이죠. 프랑스 파리의 노포(老鋪)에 가면 벽 한쪽에 우리의 ‘금강산도 식후경’ 마냥 걸려있는 글귀이기도 합니다.
사바랭의 말처럼 인간관계를 형성하고, 사람됨을 평가하는데 빠지지 않는 것이 바로 음식입니다. ‘식사 대접하겠다’는 말에는 존경의 의미가 담겨있고요. ‘밥 한번 먹자’는 공수표를 실천한 사람은 한순간에 진국이 됩니다.
그래서 언론들은 수장 회동이 있을 때마다 그들이 어디서 만나고, 뭘 먹으며, 밥값은 누가 내는지에 관심을 갖습니다. 그 속에 담긴 의미를 해석하기 위해서죠.
오늘(15일) 유일호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를 만났습니다. 임명장을 받은 지 이틀만입니다. 취임 후 6~8일가량 시간을 두고 한은 수장을 만났던 역대 부총리들 가운데 가장 빠릅니다. 그만큼 국내외 경제 상황이 긴박하다는 뜻이죠.
서울 명동 뱅커스클럽에서 마주한 두 경제 수장의 대화는 예상대로 G2 리스크와 북한의 핵실험으로 시작됐습니다. 뉴노멀 시대(저성장·저금리·저물가) 진입을 앞두고 경제정책과 통화정책이 조화를 이뤄야 한다는데 인식을 같이 했죠.
회동 메뉴는 한우 등심 스테이크였는데요. 칠레산 와인 한잔도 곁들였습니다. 두 수장은 밥값을 반반씩 냈는데요. 뱅커스클럽 홈페이지를 보면 이 식당의 런치 가격은 11만원입니다. 정부와 한은이 동등한 위치에서 경제 정책을 펴나 갈 것이란 의지가 담겨 있죠.
재정확대를 통해 경기부양을 시도했던 최경환 전 부총리도 이 총재와 여러 차례 회동을 했는데요. 그때마다 빠지지 않고 식탁 위에 올랐던 것이 바로 와인입니다.
정통 ‘한은맨’인 이 총재는 매파(물가중시 강경파)에 가깝습니다. 금리인하가 카드가 필요했던 최 전 부총리와 부딪힐 수밖에 없었죠. 와인은 두 사람의 팽팽한 기 싸움을 부드럽게 해주는 윤활유였습니다.
회동 때마다 최 전 부총리는 ‘금리의 금자도 꺼내지 않았다’며 구두개입 가능성을 부인했지만, 결과적으로 그의 재임 기간에 기준금리는 2.25%에서 1.5%로 낮아졌습니다. 지난해 7월 회동 직후 기준금리가 1.25%포인트 인하되자 시장 참여자들은 정부의 압박을 의심하기 시작했고, ‘말하지 않아도 척하면 척’이란 최 전 부총리의 말실수에 시장 개입을 확신했습니다.
‘와인 회동’에 대한 특별한 해석도 있었습니다. 와인은 대체투자 상품입니다. ‘리브-엑스 파인와인’과 ‘보르도지수’는 와인의 실시간 거래가를 보여주죠. 이 지수는 기준금리가 낮을수록, 경기가 불안할수록 오릅니다. 국채가격 하락과 변동 장세 속에서 투자자들이 위험을 회피(헤지)하기 위해 대안투자 시장으로 몰리기 때문이죠. 이에 일부 전문가들은 두 사람이 마신 와인에는 투자 활성화를 통해 경기를 부양하려는 최 전 부총리의 의지가 담겨있다고 평가했습니다. 그럴듯한 해몽입니다.
지난 2013년 현오석 전 부총리와 김중수 전 총재의 ‘곰탕 회동’ 후에도 다양한 해석이 나왔습니다. 두 사람이 만났던 곳은 서울 명동에 있는 하동관인데요. 맑고 깊은 맛의 곰탕을 파는 노포입니다. 박정희 전 대통령과 ‘장국의 아들’ 김두한 전 의원이 자주 찾던 곳이죠.
메뉴는 현 전 부총리가 제안했습니다. 기재부 직원들이 첫 만남인 만큼 호텔 레스토랑을 추천했지만, 그는 허례허식을 없애고 김 전 총재와 진솔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했습니다. 이전까지 두 사람은 기준금리 인하를 두고 이견을 보였거든요. 오래된 식탁, 따뜻한 놋그릇이 있는 노포의 분위기는 진솔한 대화를 나누기 딱 좋았습니다. 그렇게 두 경제 수장은 곰탕을 먹으며 음식 안에 담긴 상생과 공조의 의미를 나눴습니다.
화두는 ‘고용’이었습니다. 현 전 부총리는 일자리 확대를 위해 선제 정책이 마련돼야 한다고 강조했고, 김 전 총재는 통화정책으로는 한계가 있다고 답했습니다. 이야기가 무르익을 때 쯤 두 사람 앞에 곰탕이 나왔습니다.
음식을 내어 온 사람은 하동관에서 30년 넘게 일하고 있던 박순태 지배인이었습니다. 그 음식을 만든 사람은 권혁녀 주방장이었는데요. 그 또한 하동관과 30년 넘게 연을 맺고 있는 직원이었습니다. 직원을 가족 같이 생각하는 주인장의 경영철학이 두 경제 수장의 고용안정 화두와 일맥상통합니다.
음식은 외교나 정치에서 더 큰 의미를 갖습니다. 지난해 4월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을 일본으로 초청했습니다. 두 사람이 만난 곳은 총리 관저가 아닌 도쿄 긴자의 작은 스시집이었습니다. 89세의 ‘스시 장인’ 오노 지로가 운영하는 맛집이죠. 미슐랭에서 별 세개를 받아 이름을 알린 곳입니다.
아베가 회동 메뉴로 스시를 택한 건 미국의 농산물 관세 정책 때문이었습니다. 오바마는 관세를 낮춰 미국 농산물 수출을 늘리겠다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반대로 아베는 선거 때 농산물 시장 보호를 공약으로 내걸었죠. 아베 입장에서는 스테이크를 먹는 게 불편했습니다. 그래서 아베는 대화의 주제가 농산물 개방으로 흐르지 않도록 선수(?)를 쳤습니다.
스시를 좋아한 오바마 대통령이었지만 그는 절반 가까이 음식을 남겼습니다. 외교적 결례였죠. 그러나 여기에도 의미가 담겨있었습니다. 농산물 시장을 열어주지 않는 일본에 대한 서운함을 우회적으로 표현한 겁니다. 결국 오바마 대통령은 회동 갈무리에 “총리님 지지율이 나보다 높으니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얘기 좀 들어달라”고 언중유골을 남겼습니다.
‘꿈보다 해몽’이긴 하지만 수장들 회동 음식을 보면 현안을 알 수 있습니다. 이제 그들이 나누는 대화뿐만 아니라 함께 먹은 음식에도 관심을 가져보세요. 기사가 훨씬 재미있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