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역사적 인물을 속속들이 알기 어렵다. 아는 것은 그저 단편적이거나 공적 모습인 경우가 많다. 중국의 사상가, 교육자이자 백화(白話)운동의 기수였던 후스(胡適)의 삶을 살펴보면 그런 생각을 하게 된다.
1891년 12월 17일 중국 안후이(安徽)성에서 태어나 1962년 2월 24일 대만에서 숨질 때까지 후스는 중국의 개화와 사회개량을 위해 노력했다. 그는 1914년 미국 코넬대를 졸업하고 콜럼비아대에서 존 듀이에게 교육학을 배워 프래그머티즘을 몸에 익혔다.
1917년 1월 ‘문학개량 추의(芻議)’를 잡지 ‘신청년’에 발표, 백화문 사용 등을 통한 문학혁명을 선도했다. 이론으로는 후스, 작품으로는 루쉰(魯迅)이 문학혁명을 이끌었다. ‘추의’는 자기 의견을 보잘것없다고 낮추는 말이다.
이어 베이징(北京)대 교수로 문학이론 등 광범한 분야를 연구하고 과학과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5·4문화혁명의 중심인물로 활약했다. 젊어서 경도됐던 마르크스 노선과 결별한 뒤 주미 대사, 베이징대 총장을 역임한 그는 1948년 중공 정부 수립 직전에 미국에 망명했다가 대만으로 건너가 중앙연구원 원장 등 요직을 맡았다. 철저한 자유민주주의자였던 그의 저서로는 ‘중국 철학사 대강’ ‘백화문학사’ 등이 있다.
하지만 그는 고독했다. 젊어서 과부가 된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고, 늘 병약했다. 14세 때 일자무식인 고향 처녀와 홀어머니의 뜻에 따라 약혼하고 13년 뒤 결혼했다. 후스는 유학시절에 안 6세 연상의 백인 여성과 죽을 때까지 50년 가까이 밀회를 했다. 또 한 여인은 셋째 형수의 여동생. 후스의 아이를 낙태시키기도 했던 그녀는 나중에 중국 최초의 여자 농학교수가 됐다. 말이 통하지 않는 결혼생활을 45년간 지속하면서 두 여인과 애타는 사랑을 해온 게 후스의 또 다른 면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