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타차 박빙의 우승 경쟁이 갤러리들을 숨죽이게 했다. 1번홀(파4)부터 시작된 숨 막히는 우승컵 경쟁은 한치 앞도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다. 3일 끝난 일본여자프로골프(JLPGA) 투어 시즌 5번째 대회 야마하 레이디스 오픈 최종 4라운드 풍경이다. 살얼음판 명승부 속 주인공은 한국 여자 프로골퍼 3인방 이지희(37), 신지애(28ㆍ스리본드), 윤채영(29ㆍ한화)이다. 이 중 마지막까지 빛난 별은 베테랑 이지희다.
그의 플레이는 겨우내 흘린 땀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짐작케 했다. 그린 주변 어프로치는 한 치의 머뭇거림도 없었고, 확신에 찬 퍼팅 스트로크는 거침없이 버디로 이어졌다. “올핸 상금왕이 목표다!” 시즌 개막 전부터 당당하게 목표를 밝힌 그에겐 자신감이란 든든한 무기가 있었다. 충분한 연습량에서 품어 나오는 자신감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자신감이 결과로서 입증되기까지는 상당한 인내가 요구됐다. 이 대회 전까지 4개 대회를 치렀지만 두 차례나 컷 탈락할 만큼 샷 컨디션이 좋지 않았다. 그저 버티는 수밖에 없었다. 인내심에 한계가 느껴질 쯤 드디어 기회가 찾아왔다. 어린 동생들과 챔피언 조에서 마지막까지 우승 경쟁을 펼치던 이지희는 경기 막판 거짓말 같은 뒷심을 발휘하며 전세를 뒤집었다. 개인 통산 20번째 우승은 그렇게 예고 없이 찾아왔다.
2000년 JLPGA 신인전 가가전자(加賀電子)컵 우승(정규 투어 대상 외) 후 2001년 JLPGA 투어에 정식 데뷔했고, 그 해 다이오제지 에리엘 레이디스 첫 우승을 시작으로 이번 야마하 레이디스 오픈까지 16년간 쉼 없이 달려온 결과다.
그의 연도별 우승 기록을 살펴보면 그야말로 감탄사가 절로 난다. 2001년(1승)부터 거의 매년 1~2승 이상을 달성하면서 단 한 차례도 시드를 잃지 않을 만큼 꾸준한 활약을 펼쳤다. 우승 없이 보낸 2004년(44위)과 2007년(38위)이 가장 저조했던 기록으로 남아 있을 뿐이다. 서른 중반이던 2013년과 2014년에는 2년 연속 우승과 인연이 없었다. 상금순위는 각각 27위와 21위에 머물러, 그의 골프 인생 내리막길이 시작되는 듯했다.
그러나 이지희는 투철한 자기관리와 지독한 연습량으로 흐르는 시간마저 거꾸로 되돌렸다. 지난해 2승을 달성하며 상금순위 5위로 올라섰고, 올 시즌도 일찌감치 승수를 챙기며 전성기를 연상케 하는 기량을 펼쳐보이고 있다.
16년간 한결같기가 어디 쉬운 일인가. 지난 16년은 참으로 많은 사건ㆍ사고와 스타플레이어가 한줄 역사를 남긴 채 팬들 기억 속에서 멀어졌다. 박세리(39ㆍ하나금융그룹) 이후 김미현(39), 박지은(37), 한희원(38), 장정(36ㆍ이상 은퇴) 등이 미국여자프로골프(LPGA) 투어 1세대 한국인이란 이름으로 화려한 골프 역사를 남기고 필드를 떠났다. 마지막 남은 레전드 박세리도 올해를 끝으로 은퇴한다. 이정도면 이지희의 성실한 자기관리를 칭찬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이지희는 아직 은퇴란 단어가 멀게 느껴진다. “은퇴는 생각해본 적도 없다. 나에게 한계가 온다면 그때 가서 생각해보겠다.” 야마하 레이디스 오픈 우승 후 기자들에게 밝힌 말이다. 그의 식을 줄 모르는 열정은 아마도 이루지 못한 꿈이 있기 때문일 거다. 상금왕…. 16년간 20승을 장식하고도 이루지 못한 꿈이다.
하지만 그가 JLPGA 투어에서 남긴 위대한 족적은 상금왕보다 눈부시다. 우리보다 한발 앞서 있던 일본 골프에 맨몸으로 뛰어들어 한국 골프의 존재감을 알렸고, 신현주(36ㆍ은퇴), 전미정(34ㆍ진로재팬), 안선주(29), 이보미(28ㆍ혼마골프), 김하늘(28ㆍ하이트진로)로 이어진 JLPGA 투어 속 ‘골프 한류’의 밑거름이 됐다.
그의 족적을 더욱 돋보이게 하는 건 변하지 않은 인성이다. 20승이나 달성한 레전드지만 인터뷰 중에는 아직도 수줍은 소녀 감성이 그대로 남아 있다. 일본 현지 기자들 중에는 일본의 어린 선수들이 이지희에게 배워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도 있다. 단 한 차례의 우승만으로도 대선수라도 된 듯 착각에 빠지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이정도면 그의 실력과 인성은 더 이상의 검증이 필요 없을 듯하다. 하지만 한 가지 아쉬운 게 있다. 그의 위대한 순간을 함께한 메인 스폰서가 없었다는 점이다.
프로골퍼에게 스폰서는 액수를 떠나 명예이자 자부심이다. 힘든 상황에서는 동반자 역할을 하기도 한다. 그런 면에서 타국 땅에서 고독하게 싸워야 했을 이지희의 역경이 어느 정도였을지 짐작이 간다. 이제 그는 상금왕과 30승이란 새 목표를 겨냥했다. 30승. 언제가 될지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그 위대한 순간에는 꼭 함께하는 누군가가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