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철순 칼럼] “나는 너다”

입력 2016-06-07 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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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필 겸 미래설계연구원장

5월의 두 사건이 사람들을 아프게 하고 있다. 강남역 인근의 화장실에서 아무 죄도 없는 여성이 알지도 못하는 남자에 의해 살해되더니 구의역에서는 스크린도어를 수리하던 19세 청년이 전동차에 치여 어이없이 목숨을 잃었다.

구의역 사건은 이번이 처음도 아니다. 달라지지 않은 구조적 문제로 똑같은 양태의 사건이 발생한 게 벌써 세 번째다. 스크린도어 수리는 2인 1조로 해야 하지만, 사망자는 혼자 작업을 하고 있었다. 그 아이를 그렇게 죽든 말든 혼자 내버려두고, 소속 회사나 서울메트로나 서울시의 직원들은 한눈을 팔고 있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강남역과 구의역은 죄 없는 내 또래의 젊은이, 또는 내 자식과 같은 아이들에 대한 애도와 연민의 추모 장소가 되었다. 남의 불행을 내 불행으로 생각하는 공감과 유대의식이 SNS라는 감정공동체를 통해 널리 확산되고 있다. 누구나 언제나 그런 불행과 참변을 당할 수 있다는 불안, 그래서 “나는 그저 운이 좋아 죽지 않았을 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우리 사회의 미래라고 할 수 있는 젊은이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특히 구의역 희생자 김군의 경우 비정규직 근로자의 열악한 상황 때문에 공감과 울분의 강도가 크다. 노동시장은 불안정하고 미래는 불확실한데 안전이 담보되지 않는 사회에 노출된 젊은이들에게는 김군의 일이 남의 일이 아니다. 전철역에서 발생한 ‘세월호 사건’이라 해도 될 만큼 발생 원인은 복합적이다.

가장 가슴 아픈 것은 김군 어머니의 절규다. “아들을 책임감 있게 키운 게 미칠 듯이 후회된다”, “둘째 아이는 절대 그렇게 가르치며 키우지 않겠다”, “우리 사회는 책임감이 강하고 지시를 잘 따르는 사람에게 개죽음만 남을 뿐이다”…. 어머니의 호소와 절규는 눈물 없이 읽을 수 없다. 김군의 죽음이 김군의 과실인 양 호도하고 은폐하는 자들은 대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을까.

두 사건을 계기로 우리 사회에 확산되고 있는 생각은 ‘너는 나다’라는 것이다. 내가 당할 수 있는 불행이나 참변을 그가 당했다는 생각, 그러니 나와 처지가 비슷하거나 같은 사람들에 대해 관심과 애정을 가져야 한다는 반성을 두 사건은 잘 일깨워주고 있다.

‘너는 나다’는 사실 1970년에 열악한 노동현실을 고발하며 분신한 전태일씨의 40주기에 맞춰 나온 책의 제목이다.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을 추모하며 우리 시대의 전태일을 응원하기 위해 여러 사람이 함께 썼다. 이보다 10년 전 그의 30주기에는 ‘너는 나의 나다’라는 시집이 나왔다. 전국노동자문학회의 동지의식과 유대가 빚어낸 책이다.

‘너는 나’, ‘너는 나의 나’라는 말을 들으면 나와 너의 차이와 구별과 함께 동질성과 공감의 동류의식을 생각하게 된다. 인간이 이루어내는 모든 업적과 역사는 이런 생각과 공통된 의식의 바탕 위에서 만들어진 것이리라. 네가 없으면 내가 없고. 너의 성취는 곧 나의 성취인 것이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 강조돼야 할 것은 ‘너는 나다’가 아니라 ‘나는 너다’가 아닐까. ‘너는 나다’의 연민과 동류의식을 넘어 ‘나는 너다’라는 반성과 자기인식이 더 중요해진 게 지금 우리 사회다. 특히 어느 조직, 어느 공동체든 우두머리나 간부인 사람들은 내가 너의 노력과 희생 위에 이 자리에 앉아 있다는 생각, 그러니 나와 다름없는 너를 위해서 안전과 행복을 지켜주려 하는 자세, 너를 위해 무엇을 해줄 수 있을까를 끊임없이 궁리하는 마음을 갖춰야 한다.

내가 너든 네가 나든 이런 말이 강조하는 것은 역지사지(易地思之)이지만, 내가 곧 너라는 생각이 우두머리들에게 결여된 사회는 암담한 절망사회일 수밖에 없다. 우리는 대체 언제까지 이런 사회에 살아가야 하나. 동류의식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책임의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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