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호사는 용병이구나’ 회의…사회적 약자 찾아 낮은 곳으로
법조계 비리가 떠들석한 요즘이다. ‘전관(前官)’들이 어쩌면 ‘현관(現官)’과 짜고 ‘돈 있는’ 사람들의 죗값을 거액의 수임료를 받고 낮춰줬을 것이란 혐의가 밑바닥까지, 뿌리까지 드러날 수 있을지 관심이었다. 그러나 또 검찰은 꼬리 자르기식 수사만 하다 끝내는 것 같다. 전관에 대한 확실한 예우(?)에 대한 혐의는 여전할 수밖에 없다.
심지어 변호사는 ‘산다’는 말의 목적어가 되기도 한다. 적절한, 혹은 후한 수임료만 지불하면 법원과 검찰 사이에서 기능해주는 존재라는 인식이 팽배하다. 그런 의미에서 비로소 보게 된 변호사법 제1조 제1항은 놀라웠다. “변호사는 기본적 인권을 옹호하고 사회정의를 실현함을 사명으로 한다”고 쓰여 있어서. 그렇다면 왜 ‘인권 변호사’‘공익 변호사’란 존재가 변호사라는 일반명사에서 따로 파생돼 나와야 하는 것인지. 법이 힘없고 돈없는 사람들에게 멀게만 느껴지지 않도록 변호사로서의 소임에 더욱 집중하고자 하는 ‘특별한’ 이들에게만 이런 명찰이 달린다.
“연수 중에도 뭔가 의미있는 일을 하고 싶다는 막연한 생각은 갖고 있었는데 그것이 무엇이 되어야 하나 모르고 고민중이었어요. 그러다가 아름다운재단에서 공익 변호사팀 공채를 한다는 공고를 본 겁니다. 말이 너무 멋졌어요.‘낮은 곳에 임하는 용기로 소외된 희망을 되살린다’라고 쓰여 있었죠.” 기자가 “네? 다시 한 번 말씀해주시겠어요?”라고 받아적다 다시 물어봤는데 그 말을 토씨하나 안 틀리고 똑같이 되뇌는 소라미 변호사.
“의미와 보람이 제가 하고 싶은 일을 고르는데 있어 가장 중요한 가치였어요. 그렇게 사법연수원 동기 4명이 아름다운재단 소속 공익 변호사가 됐는데 모두 무슨 일을 해야 하는 지도 몰랐어요. 아직 그 팀의 성격도 정해지지 않은 때였거든요. 출근을 하면 회의만 했어요. 뭘 해야 하지, 하면서. 그러다가 제가 여성인권 분야를 맡게 됐죠. 담당 업무가 생겼지만 첫 1년은 너무 어려웠어요. 성매매 피해 여성이나 이주여성을 돕기 위해 다시함께상담센터(http://www.dasi.or.kr), 이주여성인권센터 등을 찾아가면 반응은 거의 두 종류였죠. 변호사니까 우리의 문제를 모두 다 해결해 줄 것이란 입장을 가진 사람들, 그렇지 않으면 자신들을 정치적으로 이용해 뭘 도모하는게 아니냐는 의심섞인 입장. 롤모델도 매뉴얼도 없었어요. 자신감이 없으니 재미는 더욱 없고. 그래도 3년을 꾸준히 그 일을 하니 비로소 전문가가 되는 느낌이 드는 순간이 왔어요. 인정도 받고. 그러자 기운이 나고 재미있어졌어요. 다른 분야로 옮길 생각을 해봤냐구요? 아뇨, 여기 이 일이 너무 재밌고 보람되어서 어디 갈 생각조차 못 했어요”
2004년 아름다운재단 산하에서 시작한 공익 변호사 일은 2013년 비영리 공익인권법 재단 공감을 설립해 독립하는 것으로 한 단계 도약한다. 소라미 변호사가 당연히 주축이 되었다. 공감의 리플릿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법이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의 삶을 바꾸어 나가는 정의와 보살핌의 도구가 되기를 희망합니다”라고.
소라미 변호사가 성매매나 성폭력, 가정폭력, 그리고 외국인 이주여성들의 인권을 위해 일한다면 아파트 경비원과 청소 노동자, 여성 노동자, 비정규직의 노동권을 보호하고 차별을 없애기 위해 활동하는 이는 윤지영 변호사다.
윤 변호사는 사법연수원을 수료한 이후 대부분 그런 것처럼 규모가 제법 큰 로펌에서 몇 년을 보냈다.
“불안정한 지위에 있는 노동자, 취약 노동자들에 대한 생각을 특별히 하게 된 계기가 있었던 건 아니에요. 저희 가족이 대개 바로 이러한 취약 노동자로 지내 왔기에 늘 생각을 했던 일이었죠. 어머니는 가사 도우미로 일하셨던 중고령 여성 노동자였고, 언니도 개인 사업자이긴 하지만 영세한 규모이고 동생은 또 기간제 교사였고 남동생은 청년 백수였으니 제가 노동 분야 변호사가 될 수밖에 없지 않았나요?(웃음) 몇 년 열심히 일해 돈을 좀 벌고 나니 비로소 이제는 내가 하고 싶었던 일을 하자는 생각이 들었고 공감을 찾아오게 됐죠”
윤 변호사를 두고 소라미 변호사는“변호사라기보다 활동가 같다. 새벽까지 맹렬하게 일하고 현장을 뛰어 다닌다”고 한다. 윤 변호사도 굳이 그 설명을 부정하지 않는다.
“공감이라는 조직은 특성상 조직이 위계가 있는게 아니라 수평적이고, 하고 싶은 일을 알아서 하는 살아있는 조직이에요. 연봉은 3분의 1로 줄었지만 절대 후회하지 않아요. 변호사가 대체 뭐하는 직업인가 회의가 올 때 의미를 찾아오게 됐고 자부심을 비로소 갖게 됐거든요”
“그러다가 아이가 태어났고 비로소 현재가 아닌 미래를 적극적으로 생각하게 됐습니다. 부모님은 저에게 ‘네가 사는 미래는 더 나아질 것’이라고 하셨죠. 그러나 저는 제 아이에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없는 거에요. 이 아이가 살아갈 세상은 과연 나아질 것인가 회의가 들었거든요. 그래서 더 좋은 세상을 만드는 일을 하고 싶었고 공감을 찾게 되었습니다”
박 변호사가 공감에 와서 처음 맡은 건 군의문사 사건. 군복무 중 자살로 사망한 경우 국가유공자로 지정되지 않았다. 그 자살이 군대 내 가혹행위나 비인간적 처우 때문이었더라도. 박 변호사는 3건의 사건을 대리하게 되었는데 사법부는 가혹행위가 원인이 되어 자살을 했더라도 심신상실이나 정신착란 상태에서 이뤄졌다는 입증이 없는 한 자해행위로 봐 국가유공자 해당성이 없다고 본 것이다. 박 변호사는 세 건을 맡았다. 두 건은 어렵사리 고등법원을 통과했는데 결국 대법원에서 패소. 고등법원에서도 패소됐던 세 번째 사건은 의외로 대법원에서 전원합의체 판결이 나왔다.“군대 내 자살을 자살자 개인의 의지박약이나 나약함 탓으로 돌리는 것은 성숙한 사회의 모습이 아니며, 유가족에 대한 적절한 위로와 보상 또한 국가의 책무”라고 쓰인 판결문 보충의견은 지금 읽어도 눈물이 솟는다는 박 변호사. 지금은 난민 문제를 전담하고 있다. 난민인정에 박하며 승인까지도 길면 5년까지 걸리는 우리나라에서 난민 문제를 풀기란 결코 쉽지 않지만 우직하게 이 길을 고르게 다지려 한다.
공감이 출발할 때만 해도 공익 전담 변호사 단체는 하나 뿐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희망을 만드는 법’‘어필’같은 후배 단체들이 생기는 것도 반가운 일이다. 이제는 지속가능한 재단이 되는 것이 큰 고민이다. 상임 변호사도 늘려 법의 사각지대에 있는 더 많은 사람들을 돕고 싶어 한다. 약 1600명에 이르는 후원자 대열에 살짝 동참하는 것도 법이 만인에게 더 평등해지고 세상이 더 정의로워지길 바라는 마음의 표현이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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