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리사 메이 영국 내무장관이 13일(현지시간) 제76대 영국 총리에 오른다. 이로써 영국은 ‘철의 여인’ 마거릿 대처 전 총리가 물러난 지 26년 만에 여성 총리 시대가 열리게 됐다.
메이 장관과 집권 보수당 대표 경선 결선에 올랐던 앤드리아 레드섬 에너지 차관이 11일 경선 포기를 선언하면서 당수 자리는 자연히 메이에게 돌아왔다. 이에 분열된 보수당의 결속과 영국의 성공적인 유럽연합(EU) 탈퇴 협상의 공은 메이의 손으로 넘어왔다. 데이비드 캐머런 현 총리는 13일 메이의 총리 취임과 함께 사퇴한다.
메이는 영국의 EU 탈퇴파를 이끌었던 보리스 존슨 전 런던 시장이 보수당 대표 선거 출마를 포기하면서 막판에 총리 후보로 급부상했다. 메이와 함께 마지막까지 경선을 치를 것 같았던 레드섬이 갑자기 경선 포기를 선언한 건 브렉시트 결정으로 분열된 당내 화합과 EU 협상을 최우선시하려는 당의 압력에 의한 것으로 풀이된다. 원래 경선 일정은 약 15만 명의 보수당 당원들이 메이와 레드섬 두 후보를 놓고 오는 9월 8일까지 우편투표를 벌인 뒤 이튿날 당선자가 발표될 예정이었다. 하지만 레드섬이 “아이가 없는 메이보다 엄마인 자신이 총리 적임”라는 공개 발언으로 여론의 비판을 받으면서 당 대표 결정은 예상보다 싱겁게 끝이났다.
그러나 메이가 신임 총리로서 짊어진 책임은 막중하다. 지난 달 23일, 브렉시트 찬반 국민투표 후 영국 파운드화 가치는 줄곧 곤두박질을 치다가 이달 6일에는 1.28달러로 31년 래 최저치까지 떨어졌다. 브렉시트로 인한 경기 둔화와 영국 부동산 시장 침체 우려가 커진 것이 파운드화에 대한 하락 압력을 높였다. 이런 가운데 런던에 유럽 본부를 둔 세계적인 기업들이 EU 역내의 다른 나라로 거점을 옮길 조짐을 보이면서 이같은 부의 연쇄는 한층 거세질 것이라는 암울한 전망 일색이다.
이런 가운데 탈퇴파와 잔류파로 나뉜 국론은 혼란을 한층 가중시켰다. 여전히 탈퇴파와 잔류파로 분류된 가운데, 브렉시트 결정이 예상 외 역풍을 몰고 올 것이라는 막연한 공포감이 조성되면서 유권자들이 재투표 청원에 나서는 등 영국의 EU 탈퇴 결정에 대한 회의감도 만만치 않다.
하지만 잔류파였던 메이 장관은 단호한 입장이다. “브렉시트는 브렉시트다.”라며 브렉시트 협상을 밀어붙이겠다고 공언했다. EU 역내 체재는 시도도 하지 않을 것이며, 뒷문으로 재가입하는 일도 결코 없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그는 11일 버밍엄 강연에서 자신이 총리가 되면, ◇모든 사람을 위한 국가 비전, ◇당과 국가의 결속, ◇EU와의 탈퇴 협상을 위한 강한 리더십 등에 중점을 두겠다고 강조했다.
일각에서는 메이를 두고, 스페인 무적 함대를 물리친 엘리자베스 1세(1533~1603), ‘유럽의 병자’로 불렸던 영국 경제를 살린 ‘철의 여인’ 대처(1925~2013)처럼 브렉시트로 국난을 겪고 있는 영국에 구세주가 될 것이라는 기대감이 크다. 그만큼 영국에서 큰 위기가 닥칠 때마다 ‘우먼 파워’가 빛을 발휘했다는 이야기다.
튜더 왕조의 마지막 군주인 엘리자베스 1세는 잉글랜드가 대제국으로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을 닦았다. 당시 화폐 개혁으로 기록적인 수준으로 치솟는 물가를 진정시키고, 재정 지출을 크게 줄여 국가 재정을 건전화하는 데에도 기여했다. 또한 영농 장려와 사치품 수입을 금지하고, 식료품 시장 안정을 위해 곡물 거래를 허가제로 돌렸다. 여기다 구빈법을 제정해 빈민정책의 기틀을 마련했다. 여기다 강력한 리더십으로 에스파냐의 침략을 막으면서 국민적 결속을 다졌다.
또한 영국 교육 및 과학장관을 지내고 보수당 대표를 거쳐 영국 최초의 여성 총리가 된 대처는 만성적인 ‘영국병’에 시달리던 영국에 새 생명을 찾아줬다. 그가 집권하기 전, 영국은 과도한 복지와 강성 노조의 막강한 영향력을 배경으로 한 지속적인 임금 상승, 여기다 생산성 저하로 경제 전반이 침체된 상황이었다. 이른 바 고복지·고비용·저효율을 특징으로 하는 영국병 탓에 급기야 1976년 국제통화기금(IMF)으로부터 구제금융을 지원받는 굴욕을 겪기도 했다.
이에 대처는 1979년 집권과 동시에 영국병 퇴치에 팔을 걷었다. 재정 지출을 줄이고, 공기업을 민영화하는 한편 규제 완화와 경쟁 촉진 등으로 공공 부문 개혁에 총력을 기울였다. 이것이 결실을 맺으면서 대처는 총리직을 세 번이나 연임, 1990년까지 집권하며 영국 사상 최장기 집권 총리로도 기록됐다. 다만 원칙에 입각한 철저한 국정 운영으로 ‘철의 여인’이라는 별칭도 얻게 됐다.
다만 그가 물러나는 과정은 개운치 않았다. 대처는 1990년 유럽 통합에 반대 입장을 고수하다가 당 지도부의 반발을 사 스스로 총리직에서 물러났다. 당시 대처는 “유럽공동체(EC)는 경제 공동체 역할만 해야 한다”며 그 이상의 발전에 반기를 들었다. 유럽은 각국이 언어도 다르고 역사와 문화적 이질감도 큰데, 정치인들의 논리 만으로 무리하게 통합하면 결국 붕괴될 수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는 통일 독일에 대해서도, 유럽과 영국에 가장 큰 위협이 될 것이라며 동서독의 통일까지 반대했다. 그의 이같은 주장은 주류 여론에 밀려 좌절됐고, 결국 그는 자진 퇴임을 선택했다.
하지만 수십년이 흐른 현재, 영국의 브렉시트 결정으로 대처의 주장이 완전히 틀리지 않았음이 입증됐다. 브렉시트 찬반 국민투표의 단초였던 난민 문제와 테러로 분출된 소수자들의 불만 등이 EU 역내에 복잡하게 얽혀있는 정치적·경제적 난맥상을 보여주고 있다는 평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