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문학산책] 그대, 현대시조를 아는가?

입력 2016-07-29 1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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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시조인가?

오랜 언어 전통을 가지고 있는 민족은 저마다 자신들만의 고유한 정형시 양식을 보존하고 계승해왔다. 영미 문화권의 소네트(sonnet)나 한자 문화권의 한시(漢詩), 그리고 일본의 와카[和歌]나 하이쿠[俳句] 등이 그 대표적 사례일 것이다. 우리에게는 ‘시조(時調)’가 가장 오랜 명맥과 영향력을 가진 정형시로 사랑을 받아왔다고 할 수 있다.

시조는 이방원과 정몽주가 주고받았던 ‘하여가(何如歌)’와 ‘단심가(丹心歌)’를 기원으로 하면서, 중세기 내내 이조년, 원천석, 성삼문, 정철, 윤선도, 황진이, 이황, 이이, 매창 같은 뛰어난 시인들로 그 계보를 이어왔다. 벌써 천년 가까이를 헤아리는 이 오랜 문학 양식은, 정형 율격에 안정된 시상(詩想)을 담는 전통적 그릇으로 인지되어왔다.

그래서 그 안에는 정격(正格)의 사유나 감각이 담기는 것이 가장 어울려 보이고, 파격의 형식이나 복잡한 정서는 불편해 보였던 것이 사실이다. 그만큼 시조는 사물과의 불화보다는 화해, 새로움의 발견보다는 익숙함의 확인, 갈등보다는 통합 쪽으로 그 중심을 할애해왔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살아가는 현대는 이러한 화해와 익숙함과 통합보다는 다양성과 낯설음과 아이러니가 미학적 주류로 기능하는 시대이다. 그러니까 전통 양식인 시조의 한계에 대한 의문이 자연스럽게 떠오를 수밖에 없다. 심지어 아직도 시조가 씌어지는가 하는 의문을 갖는 이들도 드물지 않은 것이 사실이니 말이다. 하지만 여전히 시조는 왕성하게 씌어지고 읽히고 유통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처럼 복합성이 고도로 얽혀 있는 현대에는 “왜 시조인가?”라는 질문이 끊임없이 생성되면서 시조의 존재론과 미학적 가능성에 대한 문제 제기를 계속해 나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물론 고시조를 지나 현대시조로 발전해오면서 시조는 많은 변화를 치렀다. 현대시조는 고시조와는 달리, 현대인의 복합적인 사유와 감각을 담아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과제를 감당하느라고 최근 현대시조에는 요설과 파격을 통한 충격적 시형도 많이 나타나고 있는데, 이는 형식의 확산과 다양화를 위한 고육책임에는 틀림없겠지만, ‘시조다움’을 훼손하는 경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잘 생각해 보면, 시조는 양식의 본령을 잘 견지하면서 부분적 변용을 이루어내는 것이 온당하다. 정형시 전통은 오랜 세월을 축적하면서 인간의 보편적 정서를 담아내는 그릇 역할을 고유하게 수행해왔기 때문이다.

잘 알려진 것처럼 시조가 현대적 양식으로 양식적 동일성을 가져가기에는 여러모로 인프라가 취약한 것이 사실이다. 외적 강제 규정이 가장 많이 따라붙는 양식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의 전통 시 양식 중 거의 모든 갈래가 사멸의 길을 걷거나 다른 장르로 흡수되어버린 것에 비해, 시조는 우리 문학의 장자(長子) 노릇을 아직도 수행하고 있다는 점에서 여전히 현재형의 장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정형이라는 제약 때문에 어려운 장르라고 인식할 수는 있겠지만, 창작과 향유의 현재성을 거느리고 있는 양식이 시조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김천택이 1728년 편찬한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시조집 ‘청구영언’(靑丘永言). 최근 국립한글박물관이 원본을 입수했다. 왼쪽에서 두 번째 시조가 태종 이방원의 ‘하여가’(何如歌)다. 국립한글박물관 제공

정형시와 자유시

정형시와 자유시 사이에는 형식적, 내용적 차이가 일정하게 존재한다. 그 가장 주된 차이는 ‘율격’의 원리에 있다. 가령 정형시에는 일종의 선험적인 율격 원리가 주어져 있다. 그것을 충족하지 않으면 결코 정형시가 될 수 없는 최소한도의 요건이 존재하는 것이다. 반면 자유시에는 그 어떤 원리도 미리 주어진 것이 없고, 시인의 호흡에 따른 자유로움만이 사후적(事後的) 필연성으로 부여될 뿐이다. 물론 자유시 안에도 자유로운 율격이 있는 것이지, 율격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런데 최근 씌어지는 자유시는 줄글로 씌어지는 산문시 양식이 범람하는 데다, 최소한의 내적 호흡에 바탕을 둔 운율마저 사라지는 경우가 많아서 율격 훼손의 극점을 보여주는 경우가 드물지 않다. 그 점에서 자유시와 거의 구별이 안 되는 시조작품이 많이 선보이고 있다는 것은 큰 문제점이다.

이때 우리는 다시 한 번 “왜 (굳이) 시조인가?”라는 원론적 질문을 던져보게 된다. 자유시로도 표현 가능한 것을 왜 ‘시조’라는 구속적 형식을 통해 표현하려 하는가? 첨단의 디지털 시대에 ‘시조’라는 오래된 양식의 궁극적이고 필요불가결한 존재 이유는 무엇인가? 이러한 질문들과 마주할 때, 우리는 시조에 어떤 고유한 표현 형식과 자질이 있다는 점에 다시 한 번 상도(想到)하게 된다.

시조가 창사(唱詞)로서의 굴레를 벗어나 문자예술로서의 성격만 남은 점을 고려한다면, 필연성도 없이 율격을 파괴하거나 해체하는 것은 적극 경계할 필요가 있다. 오히려 단형의 정격을 단아하게 지켜냄으로써 시조는 SNS 시대의 매체적 속성을 한껏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3장 6구의 제약은 이때 온전한 맞춤형의 최적화 형식이 될 수 있다.

우리의 언어, 습속, 정신, 위의(威儀)를 그 안에 자연스레 내장하고 있는 시조는, ‘시절가조(時節歌調)’라는 어원에서도 알 수 있듯이, 한 시대의 풍속과 이념, 그리고 보편적 정서를 끊임없이 드러내고 표상해온 우리 문학의 정수(精髓)이자 보고(寶庫)이다. 우리는 이 같은 긍정적 요소들을 계속 발전시켜, 서구의 미학적 박래품(舶來品)에 대한 적극적인 실천적 항체(抗體)로 현대시조를 키워가야 할 것이다.

▲‘청구영언’의 서문 부분.

정형은 ‘존재의 집’이다

결국 우리는 시조의 고유 자질인 ‘정형’이, 자유로운 시상을 가로막는 불필요한 장애 요인이 아니라 그러한 형식적 특성을 통해서만 성취가 가능한 어떤 불가피한 ‘존재의 집’임을 강조하게 된다. 이러한 불가피한 정형의 울타리를 통해 우리는 스케일이 큰 우주적 상상력에서부터 작고 미세한 사물들의 움직임에 이르는 다양한 시적 경험을 하게 되기 때문이다. 또한 장중하고 파장이 큰 내러티브와 함께 이른바 ‘충만한 현재형’에서 구축되는 순간적 정서를 다양하게 만나게 된다.

그리고 그러한 상상력과 정서가 정형 안에 잘 갈무리됨으로써, 이러한 해체 지향의 시대에도 잘 짜인 고전적 감각과 인식을 경험할 수 있게 되고, 인간의 원초적이고 미분화된 정서와 통합적 삶의 이치를 만나보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에게 주어진 여러 난경(難境)을 극복하는 유일한 길은, 시조의 ‘시조다움’을 더욱 첨예화하는 것밖에 없다. 정형은 그 점에서 폐쇄적이고 답답한 ‘존재의 감옥’이 아니라, 더없이 단란하고 화목한 ‘존재의 집’일 것이다

많은 서양인들은 시조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시조가 일본의 하이쿠에 비견되는 생명력과 자기 갱신력을 가진 장르라고 이해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시조가 가창적(歌唱的) 속성을 버리고 문자 예술로서의 지위만을 굳히게 되면서 근대 자유시에 주류의 자리를 내주게 되었다 할지라도, 이제부터라도 그 문학사적 공백을 반성하면서 현대시조에 대한 역사적 정리와 탐색을 열어 가야 한다. 말하자면 정밀하고 잘 씌어진 현대시조문학사(現代時調文學史)가 필요한 것이다. 우수한 연구자들에 의해 완성될 견고한 정형 미학의 역사 서술은, 정제된 의미론을 한없이 탈주하고 있는 국적 불명의 현실에서, 우리로 하여금 역설적 경종을 주는 자산이 될 것이다.

생각해 보면 조선시대의 양축을 구성했던 시조와 가사 가운데 가사는 완전히 소멸한 데 비해, 시조는 시인의 숫자만 1000명이 넘어설 정도로 활황을 누리고 있다. 시조를 싣는 문예지가 20여 종이나 되고, 시조 관련 문학상만도 10여 개를 헤아리고, 시조 관련 단체도 여럿이며, 시조 백일장이나 시조 낭송대회 같은 행사들도 여러 곳에서 시행되고 있다. 또 국제시조협회가 새롭게 발족하여 시조의 세계화에 나설 준비도 하고 있지 않은가. 이에 비춰 우리는 ‘시조’를 얼마나 아는가? 그대, ‘현대시조’를 아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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