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윤경 기획취재팀장
일단은 여성들이 조직에 ‘많아야’ 여성이 특수한 존재가 아니라 일반적인 존재가 되면서 이해도가 높아질 수 있다는 점에서. 또한 의사결정권을 갖춘 중간관리자급 이상이 많아야 실질적인 도움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셰릴 샌드버그 페이스북 최고운영책임자(COO)가 쓴 ‘린 인(Lean In)’에도 그런 얘기가 나온다. 2011년 노벨 평화상을 받은 3인의 여성 중 한 명인 라이베리아 여성 인권운동가 레이마 그보위(Leymah Gbowee)는 자서전 ‘평화는 스스로 오지 않는다(Mighty Be Our Powers: How Sisterhood, Prayer, And Sex Changed A Nation At War)’ 출간 축하 자리에서 “전쟁 때문에 고통받는 여성들을 우리가 어떻게 도우면 되느냐”는 사람들의 질문에 아주 간단하게 답했다. “영향력을 손에 쥔 여성들이 많아지면 됩니다”라고.
샌드버그는 자신은 그보위와 성장 배경이 판이하지만 생각은 같았다고 전했다.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한다.
남성들과의 경쟁에서 살아남은 여성들은 후배 여성들에게 “너희들도 내가 했듯 힘들지만 버티고 경쟁하라”고 용기를 북돋아 준다. 중요한 일이다. 그러나 ‘희망고문’이 되기도 한다. 남성이 다수이고 중심이며 수직적 체제인 조직에서 여성들이 임원 이상의 자리를 이어가기란 쉽지 않다. 게다가 극소수인 ‘성공한 여성’ 선배들은 정치권 등의 ‘콜’을 받고 나가거나 그만두면 은둔(?)하고 말기도 한다. 그렇다면 깨졌던 유리천장이 다시 개보수되는 셈.
그래서 유리천장을 깨 봤던 여성들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 원치 않아도 후배들에겐 롤모델, 앞길을 보여줄 등대 같은 존재가 되기 때문이다.
그래도 앞서간 여성 선배들이 후배들에게 용기를 주고 키우려는 노력이 꿈틀거리고 있다. 지난달 28일 여성금융인네트워크와 이투데이가 같이 주관해 열린 ‘2016 대한민국 여성 금융인 국제 콘퍼런스’에서 이런 이야기들이 소개됐다. 유리천장을 뚫기까지도 중요하지만 그 이후까지도 선배 여성들이 어떻게 활동하고 있는지가 진솔하고 구체적으로 전해져 반가웠다.
여금넷은 2003년 출범 이후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금융권 여성 임원들을 모아 연대하도록 하는 구심점 역할을 해 왔고, 앞으로 후배 여성 금융인을 키우는 노력을 더 구체화할 방침이다. 김상경 여금넷 회장이 구사하는 전술(?) 중 하나는 현직 임원뿐 아니라 임기를 마치고 마땅한 자리가 없어서 쉬고 있는 사람, 외부 활동을 자제하고 싶어 하는 전직 여성 임원들도 계속 모이게 하는 것이다.“내가 잘렸다(해고됐다)”라고 소문내고 다니란 얘기도 한다. 사회 생활, 경제 생활을 충분히 더 할 수 있는 인재들이 스스로 더 일할 길을 개척할 멍석을 깔아주려는 것이다.
손병옥 한국푸르덴셜생명 회장은 “솔직히 나이 50세가 될 때까지도 후배를 키워야겠다는 생각까지는 미처 못 했다. 내가 조직에서 살아남기만도 바빴다. 그러나 그 정도 이력을 쌓고 보니 아차 싶더라. 후배를 키워야 여성들이 계속해서 능력을 발휘해 나갈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손병옥 회장이 기업 여성 임원을 대상으로 WIN(Women in Innovation)이라는 단체를 이끌어가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박현주 SC제일은행 부행장보는 사내 ‘다양성 및 포용성 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여성들의 사회생활이 지속가능하도록 하는 데 애쓰고 있다. 자녀를 초청해 엄마의 직업 체험을 해보도록 하거나 휴직 중에도 소속감을 유지해 회사로 돌아오기 쉽도록 하는 것이 효과적이었다고.
제도적 지원 이전에 이렇게 여성 선배들이 직접 등대 역할을 해주고 있는 것이 중요하다. 유리천장 깨기가 끝이 아니다. 어쩌면 깬 이후와 이전이 단절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 더 중요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