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작가
한데 이번 영화 ‘고산자, 대동여지도’를 앞두고 상당히 긴장된 모습이 역력했다. 개봉 직전 터진 이른바 식민사관의 입장에서 영화의 스토리가 구성되었다는 소문이 인터넷상에 퍼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김정호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에 식민사관이 개입되어 있겠나 하는 생각에 진상을 알아보니 이러했다.
일제 강점기, 육당 최남선은 조선을 빛낸 인물 중 지리 분야에서 김정호를 꼽았다. 1925년 동아일보에 실린 기사를 통해서는 김정호가 전국을 방방곡곡 직접 답사하며 지도를 만들었고, 백두산을 일곱 차례나 올랐으며, 이후 완성된 목판은 조선 정부에 의해 몰수당했다는 세 가지 설을 주장하였다. 최남선의 의도는 지도의 정확성과 김정호의 헌신을 널리 알리기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 1930년대 조선인들을 교육하기 위해 일제가 만든 교과서 ‘조선어 독본’에는 이를 개악하여 의도적으로 조선 정부와 조선인을 깎아 내린 내용으로 서술되었다. 즉 김정호는 조선의 지도가 엉망으로 만들어져 있어 애를 먹었으며, 조선 정부는 이런 무능함을 감추기 위해 목판을 모두 몰수해 불에 태워 버렸고, 심지어 김정호가 만든 지도는 적에게 정보를 제공해 준다는 이유로 김정호 부녀를 옥에 가둬 굶겨 죽였다는 것이다.
무지한 조선 정부를 일본이 이만큼 근대화시켜 줬다는, 이른바 식민지 근대화론을 뒷받침하기 위한 도구로 김정호의 일화가 사용된 것을 영화로 만든 거라는 주장이 제기된 것이다.
한마디로 해프닝이었다. 영화 첫 시사회 때 강우석은 직접 마이크를 잡더니 “혹시 식민사관으로 이 영화가 만들어졌다고 생각하신 분이 있다면 개봉 첫 타임 때 보시라. 절대 그렇지 않다. 이 영화에 있는 건 코미디이고 없는 건 식민사관이다”라고 호소했다.
아쉽게도 영화는 흥행에 실패했다. 약 100만 명 조금 넘는 관객 동원을 하여 손익분기점에 한참 모자라는 스코어를 기록하고 극장에서 재빨리 내려지고 있다. 그러나 흥행이 부진한 이유는 식민사관의 영화라는 소문 때문이 아니다. 순전히 영화 자체의 재미와 흥미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강우석 감독의 연출력이 한물간 게 아니냐는 성급한 독설도 흘러나온다. 하긴 영화 중간에 김정호 역을 맡은 차승원이 현재 출연 중인 방송 프로그램 ‘삼시세끼’를 연상시키는 대사를 했을 때 아차 싶었다. 요즘 유행하는 아재 개그처럼 보이기도 하고, 김정호라는 인물에 대한 몰입을 방해하는 장면처럼 느껴졌다. 관객은 킥킥거렸지만 이미 고산자의 그 땀내 나고 눈물겨운 역정은 값싼 유머에 증발해 버렸다.
김정호의 기록은 모든 사료를 다 모아도 A4용지 한 장 정도다. 그만큼 남아 있는 기록이 적다. 그래서 창작자에게는 상상의 공간이 더 클 수도 있고 오히려 부담스러울 수도 있다. 한국사 교과서에는 단 두 줄만 언급되어 있을 뿐이다.
김정호의 호는 고산자(古山子, 옛 산의 아들)이며 정조가 승하하고 4년이 지나 세도정치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순조 4년(1804년)에 황해도 토산(兎山)에서 출생했다. 출신은 중인이라고도 하고 몰락한 잔반 혹은 평민이라고도 한다. 정확하게 밝혀진 건 없다. 영화는 김정호의 아버지가 잘못 그려진 지도를 보고 전쟁에 나가 동사한 것을 계기로 정확한 지도를 만들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됐다고 그리고 있다.
김정호는 초기에는 지리지, 즉 인문적 성격을 띤 지리 정보를 만들다가 이후 지도에만 전념한다. 대동여지도를 만들기 전에 이미 청구도, 동여도 등을 제작해 지도 제작의 내공을 다듬는다. 1861년 대동여지도는 철종 시기에 초간본이 제작됐고 고종 원년에 재간본이 발행됐다. 실학자 최한기나 고위 관료인 신헌의 도움도 컸다.
우리가 대동여지도를 높게 평가하는 것은 그 정확성에 있는 것만은 아니다. 첫째로 높은 수준의 지리 정보를 대량 생산이 가능하도록 목판으로 인쇄하여 보급한 점이다. 이는 마치 컴퓨터의 주요 프로그램과 백신을 무료로 모든 네티즌들에게 보급한 것과 같은 이치다. 그는 이미 정보의 민주화를 실천적으로 보여준 셈이다. 또한 분첩절첩식으로 휴대가 간편하다는 점이다. 대동여지도는 전체 크기가 세로 6.7미터, 가로 3.8미터의 대형 지도이다. 가지고 다니기 불편하다. 이를 남북으로 총 22첩, 동서로 다시 20센티미터 간격으로 접을 수 있게 만들었다. 짚신 수백 켤레가 해지고, 백두산을 수차례 등정한 것보다 더 위대한 점은 바로 여기에 있다.
영화는 김정호와, 흥선대원군을 위시한 정치 권력과의 대립 구도로 전개된다. 당시 조선의 정치 지형은 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가 권력을 쥐락펴락하는 세도정치 시기였고 흥선대원군은 도광양회(韜光養晦), 남 몰래 힘을 기르는 중이었다. 두 세력은 김정호의 지도를 놓고 팽팽한 신경전을 벌인다. 지도를 갖는 자가 권력을 장악한다는 생각으로 흥선은 김정호의 목판본을 손에 얻고자 혈안이 된다. 지도가 어느 누구의 독점물이 되기를 반대했던 고산자는 만백성들에게 지도를 공개하면서 권력에 맞선다.
잘 알려진 대로 영화는 소설가 박범신이 쓴 장편소설 ‘고산자’를 토대로 만들어졌다. 박범신은 강 감독에게 특별히 부탁을 하였다. ‘고산자를 세종대왕, 충무공 이순신의 반열에 올려 달라’는 요구였다. 박범신 역시 역사자료가 절대적으로 부족해 소설을 쓰는 데 많이 힘들었다고 한다. 작가는 “김정호는 국가 권력이 장악하고 있는 국토에 대한 정보를 한 장의 지도로 완성해서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고 싶어 했다. 완전한 민주화를 꿈꿨던 사람이라고 볼 수 있다. 그의 정신 속에 위대함이 있다”고 인터뷰에서 말했다.
강 감독은 처음 만든 사극 영화였기에 고민도 많았다. 그러나 이번에 이 작품을 만들지 않으면 평생 후회할 것 같아서 씨제이(투자배급사) 측에 강하게 제작 의지를 보였다 한다.
조금은 아쉬운 영화의 완성도이지만 미덕은 따로 존재한다. 대한민국 팔도를 큰 스크린에서 맘껏 감상할 수 있는 호사가 그것이다. 일단 촬영에만 무려 9개월의 노력을 쏟았고 대한민국의 절경과 경치를 영화만이 담을 수 있는 대형 스크린에 재현해냈다. 백 번 올라가야 두 번 천지를 본다고 해서 백두산이라 이름 붙인 거라고 강 감독은 너스레를 떨면서 차승원이 백두산 천지에 올라 촬영된 그림 같은 영상을 자랑한다.
마지막 독도 이야기. 일본은 김정호의 지도에 독도가 표시되어 있지 않아 독도를 자신의 영토라 주장하는 근거로 삼았는데 대동여지도 필사본에 독도가 있음(일본 국립도서관 박물관 소장)을 국사편찬위원회가 확인해 공식 발표하기도 했다. 영화에선 김정호가 직접 독도를 방문해 답사하는 감동적인 모습이 나오기도 한다.
한 시대 누구보다 세상을 사랑했고 백성의 어려움과 고초를 이해했으며 우직한 걸음으로 평생을 한길로 걸은 김정호가 그리워지는 영화임엔 틀림없다. 지금 같은 시대에는 더욱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