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년시론] 새로운 나라, 달라진 국민을 위하여

입력 2017-01-02 1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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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철순 주필

지난해 늦가을부터 한국인들은 “이게 나라냐?”고 따져 묻기 시작했다. 나라, 곧 국가의 3요소인 ‘영토 국민 주권’ 중에서 영토는 달라진 게 없지만 국민과 주권에 큰 탈이 났기 때문이다. 주권은 달리 말하면 정부다. 그 정부의 구체적 운영 행태가 심각하게 민주공화국의 틀과 가치를 훼손하고, 주권재민을 규정한 대한민국 헌법 1조를 위배해온 사실이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를 통해 드러났다.

경제 부흥, 국민 행복, 문화 융성, 평화통일 기반 구축을 국정 운영의 4대 비전으로 제시하고, 깨끗하고 투명하고 유능한 정부를 만들어 국민의 신뢰를 얻겠다며 취임한 박근혜 대통령은 거꾸로 무능하고 불투명하고 부패한 정권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국민행복시대’는 어디로 갔으며 그토록 강조하던 공감과 소통은 어떻게 됐는가. 국민들은 모욕감과 참담함, 자괴감 속에서 대통령 퇴진 요구 촛불시위를 벌였고, 시위는 국회의 탄핵 의결과 헌법재판소의 심판을 불러왔다.

안에서 최순실이 나라를 뒤흔드는 동안 밖에서는 트럼프 미 대통령 당선인이 세계를 긴장시키고 있다. 한 치 앞도 내다보기 어려운 내우외환의 2017년을 맞아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지향할 것인가. 2017년은 민주화 30년, IMF 외환위기 20년, 이명박-박근혜로 이어지는 보수정권 10년을 맞는 해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미리 날짜까지 예정돼 있던 대통령 선거의 해다.

한국인들은 반독재·민주화 투쟁인 1987년 6월 항쟁을 통해 6·29선언과 새로운 헌법을 쟁취해냈다. 그로부터 5년 단임의 대통령 직선시대가 열리고, 민주화는 되돌리거나 거스를 수 없는 시대정신으로 작동해왔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딸인 박근혜 대통령의 집권은 산업화 세력과 민주화 세력의 화해-융합을 이루는 계기로 작동되기를 많은 사람들이 기대했지만 결과는 그 반대였다. 민주화를 역류하는 국가 운영과 통치 행태로 박 대통령은 나라는 물론 아버지의 업적까지 망쳐버렸다.

경제도 실망스럽다. 1997년 11월 외환위기를 고비로 고성장시대는 끝났다. 이젠 3%대도 성장이 어렵고 소비심리 위축, 수출 부진, 치솟는 실업률, 국정 공백까지 겹쳐 20년 전의 위기가 되살아나려 한다. 정부는 2017년 성장률 전망치를 2.6%로 발표했는데, 2%대 성장률 발표는 1998년 이후 처음이다.

성장률이 둔화하면 가장 타격이 큰 건 역시 일자리이다. 청년 실업률은 외환위기 이후 최고치를 계속 경신하고 있다. 절대 빈곤층 증가, 고독사 증가, 세계 최고의 자살률 등 이 모든 부정적 사회 현상도 근원은 경제난이다.

문제는 희망이 없어진 것이다. ‘헬조선’이라는 자기 비하와 금수저·흙수저론으로 대변되는 불평등의식, 정직과 법 준수가 깔보이는 사회, 달라지는 게 없는 교육, 불공정한 정실인사, 갈수록 공고해지는 각종 갈등 구조에서는 국민들의 삶이 피폐해질 수밖에 없고 국가와 사회의 발전을 기약하기 어렵다.

삶을 윤택하게 하고 사회 구성원들의 성숙에 기여해야 할 문화 부문도 실망스럽기는 마찬가지이다. 정권이 교체될 때마다 문화 권력의 판도가 바뀌고 진영이 다른 문화인들에 대한 배척과 제외가 계속돼왔지만, ‘문화 융성’을 내세운 박근혜 정부는 블랙리스트까지 만들어 문화계를 송두리째 망가뜨렸다. 문체부 1차관은 박근혜 정부 3년 10개월 동안 여섯 명이나 바뀌었다.

▲원로 서양화가 김정(金正)의 정유년 새해맞이 스케치 ‘닭과 일출’.

박근혜 시대를 정리한 연말의 사자성어를 살피면 우리나라가 점차 더 나빠져온 걸 알 수 있다. 2013년 도행역시(倒行逆施), 순리를 거슬러 행동하고, 2014년 지록위마(指鹿爲馬), 사슴을 말이라고 해 2015년 혼용무도(昏庸無道), 세상이 어지럽고 무도하다는 탄식이 높아지더니 2016년엔 군주민수(君舟民水), 백성이 화 나면 왕위도 뒤집는다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제 어디에서 무엇으로 희망을 찾을 것인가. 날짜가 언제든 올해 우리는 대선이라는 국가 대사를 통해 새로운 리더십을 창출하고 이로써 새로운 나라를 만들어가야 한다. 새로운 리더십은 옳고 바른 리더십, 명(名)과 실(實)이 상부하는 깨끗한 리더십이며 국가가 곧 국민이자 국민이 곧 국가이게 하는 리더십이라야 한다. 개헌은 새로운 나라를 만들어가는 데 결정적인 변수가 될 수 있다.

한국인들은 그동안 열심히 살아왔다. 산업화·민주화·정보화에서 세계에 유례가 없는 빠른 성취를 이룩한 게 한국인들이다. 그러나 그렇게 빠르게 달려오는 동안 우리는 어디로 가는지, 목표 지점이 어디인지 잊어버린 게 아닌가. 우리는 열심히 잘못 살아왔던 게 아닌가.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는 이런 반성을 가능케 한 역사적 사건이다.

1894년 갑오 동학농민 혁명 당시 농민들은 “갑오(甲午)세 가보세 을미(乙未)적 을미적거리다 병신(丙申) 되면 못 가리”라는 노래를 불렀다. 작년이 바로 병신년이었고 우리는 말 그대로 병신(病身)이 된 꼴이다. 이제 정유년이다. 정유를 正癒, 바르게 병을 고치는 해로 만들어가야 한다. “이게 나라냐?” 하는 질문에 “이게 나라다”라고 스스로 답할 수 있게 돼야 한다.

광장의 촛불이 일상의 촛불이 될 수 있도록 민주주의와 정직, 공공선을 위한 삶의 자세를 확고하게 정립해야 한다. 이제 민주화를 넘어 공공화로 이행해야 할 시점이다. 중요한 것은 내 안의 박근혜, 내 안의 최순실부터 불식하는 것이다. 우리는 사는 법을 고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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