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금희 WIN 사무총장
슬럼프가 찾아와도 다시 일어서는 강한 회복력과 성실함에서 비롯되는 열정적 끈기로 제2의 인생을 시작한 설금희 전 LG CNS 상무처럼 말이다. 재능보다 더 값진 노력으로 새로운 도전에 나선 그의 인생 2막은 어떤 모습일까. 퇴직 후 여성단체 WIN(Women In Innovation)의 사무총장이자 코칭전문가로서 새로운 삶을 사는 그의 라이프스토리가 궁금했다. WIN은 당초 여성 리더의 성장을 지원하기 위해 지난 2007년 기업 여성임원들이 만든 단체로, 2009년부터 여성부 산하 법인으로 전환됐다.
“30년간 LG CNS에서 일하다가 2013년에 퇴직했어요. 변화관리에 실패한 탓이죠. 다음 단계로 나아가려면 그에 걸맞은 리더십 역량과 탁월한 성과가 있어야 했는데, 그렇지 못했어요. 당시 고은 시인의 ‘그 꽃’이라는 시가 가슴에 와 닿았더군요.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못 본 그 꽃’이란 구절이 떠올랐죠. 인생의 오르막길을 오를 땐 앞만 보고 가느라 보지 못했던 주변의 사소한 것들의 소중함을 깨닫게 해줬어요.”
설 사무총장은 퇴직 후 갑작스럽게 찾아온 여유를 즐기기보단 변화를 받아들이는 시간을 가졌다. 직장 다닐 때와 마찬가지로 아침 7시에 일어나 생활했고, 서재에서 책을 보는가 하면 노자 인문학 강의에 한나절을 할애하기도 했다.
“많은 고민을 했던 것 같아요. 내 이름 뒤엔 항상 직위에 따른 호칭이 있었는데, 하나를 떼어내니 내가 없어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어요. 마음의 공허함을 무엇으로 채워야 할지,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찾으려 했죠. 유학과 재취업을 두고 고민하던 찰나 여성단체 WIN 차기 사무총장직을 제안받았어요. 1년 365일을 돈을 버는 것에 쓰기보다,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일을 하자고 결론을 내렸죠. 여성후배들의 성장과 발전을 돕는 것을 중요한 가치로 여기면서 삶을 살겠다고 마음먹었어요.”
설 사무총장은 2014년 3월 서강대 국제대학원 코칭과정에 입학해 코칭전문가 코스를 밟기 시작했고, 2014년 하반기 WIN의 사무총장으로 자리하면서 새로운 도전에 본격적으로 나서게 됐다. 현재 WIN에서 추진하는 각종 행사는 물론, 리더십 강연과 멘토링 등을 하면서 비즈니스 코칭 전문가로 활동하고 있다. 이처럼 그가 자신의 경험을 나누고 후배들에게 더 나은 해결방안을 조언하면서 성공적인 멘토로서 자리매김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 누구보다 치열하게 살아온 젊은 시절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당시 대기업 오너일가가 아닌 자력으로 임원직에 오른 여성은 손에 꼽을 정도로 드문 시절 임원 자리까지 꿰찼으니 말이다.
설 사무총장은 1983년 대졸 전문직 여성으로는 처음으로 LG전자(과거 금성전자) 전산실에 입사했다. 이화여대에서 경영학을 전공한 그는 은행원이나 교사로 취업하는 동기들과 달리 전산분야로 진로를 선택했다. 대학교 3학년 때 광고 전단을 보고 전산학원에 다닌 것이 계기였다.
“지금 와서 보니 미래를 내다보는 통찰력과 안목이 있었다고 할까요.(웃음) LG전자 입사 후 처음 배운 것은 사무실 청소였어요. 당시에는 여직원의 몫이었죠. 유니폼도 입었고요. ‘내가 이러려고 이곳에 왔나’라며 자괴감이 든다고 반발하는 동료도 있었지만, 나는 ‘옷은 내 인격과 별개’라고 생각하고 넘겼어요.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했죠.”
설 사무총장의 무던함과 성실함 덕이었을까. ‘결혼하면 퇴직하겠다’고 쓴 서약서도 무의미하게 만들었다. 입사 2년 만에 그만둬야 할 상황에 놓였으나 당시 직속상사가 촉탁으로 채용하면서 재입사했다. 최초 케이스였다. 1년 뒤에는 경력을 모두 인정받고 정규직으로 전환됐다.
이후 차장이 될 때까지 조직 내 전산시스템을 개발하고 운영하는 업무를 맡았다. 입사 12년 차에는 프로젝트 매니저로서 LG전자의 회계시스템 구축을 위한 대형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수행해 능력을 인정받았고, 국채 최초 전사자원관리(ERP)전문가로 거듭나게 됐다.
조직생활이 순탄했던 것만은 아니다. 수석부장 시절 부서의 정체성 논란으로 애를 먹기도 했다. 새로운 사업모델을 만들어 보자는 회사 취지 아래 신규사업 부서를 꾸리게 됐는데, 부서의 역할이 명확하지 않아 사내여론의 뭇매를 맞아야 했다. 임원 승진을 눈앞에 두고 있었기에 더 잘하고 싶은 욕심이 컸다.
“두 개의 부서 색깔이 섞여 있다 보니, 도대체 뭐 하는 부서냐는 얘기를 많이 듣게 됐죠. 힘들고 괴로웠어요. ‘내가 지금 괴롭고 힘든 이유가 정말 무엇 때문일까’ 자신에게 물었죠. 내 사심이 앞서는 건지, 조직의 발전을 위한 건지 생각했어요. 스스로 지금의 상황을 성찰하는 시간을 가지면서 얻은 결론은 내 사심을 내려놓자였어요. 그랬더니 일이 잘 풀리더군요. 다음에 임원으로 승진하게 됐죠.”
설 사무총장은 입사 20년 만에 임원 타이틀을 갖게 됐다. 대기업 1세대 여성임원 대표주자라는 수식어도 생겼다. 조직에서는 ‘별을 달았다’고 평가받으니 뿌듯함과 함께 가슴이 벅차올랐단다. ‘내가 LG그룹 임원 대열에 속했다’는 자부심과 자긍심을 갖게 되면서 묘한 전율을 느꼈다고 한다. 끊임없는 노력과 끈기로 두꺼운 유리천장을 뚫었으니 말이다.
“나는 인정의 욕구가 강한 것 같아요. 그게 나를 움직이게 하는 에너지이기도 하죠. ‘그릿’이라는 책을 보면서 굉장히 공감했어요. 난 대단히 머리가 좋고 탁월한 능력이 있진 않지만, 굉장한 끈기가 있었던 것 같아요. 끝까지 해내는 것. 그리고 상대방이 나를 인정할 때까지 노력하는 열정이 있었어요. 리더가 됐을 때는 나 자신과의 대화를 많이 했죠. 리더에게 중요한 건 자기성찰이에요. 자신을 인식해야 타인이 보이죠. 지금도 리더십 강연을 하면서 리더들에게 자기성찰이 중요하다고 말하는데, 돌이켜 보면 제 경험에서 비롯된 거 같아요.”
설 사무총장은 지난 10월 전·현직 여성임원 5명과 함께 ‘스타일스위칭’이라는 책도 출간했다. 조직 내에서의 관계의 중요성에 대해 이야기한다. 관계 속에서 종종 발생하는 갈등의 원인과 그에 맞는 해결 방법들을 담아냈다. 독자의 반응이 좋아 3판 인쇄에 들어갔다.
새로운 도전에 대한 열정으로 가득찬 설 사무총장은 지금이 “삶의 전성기인 것 같다”고 말한다. 끊임없이 자기계발을 하고자 쉴 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휴대폰 속 캘린더에는 하루에 평균 3~4개의 일정이 빼곡하게 적혀있다. 해금, 플롯, 필라테스, 스터디, 손주보기 등 다양하다.
“내가 있을 자리가 여기가 아니다. 더 큰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어요. 그것 때문에 힘들 때도 있었지만, 지금은 흔들리지 않아요. 원하는 걸 잡으려는 순간 지금 가지고 있는 걸 내어줘야 하거든요. 지금은 새로운 것을 배우고 싶은 열망이 더 커요. 그리고 그 배움과 경험을 바탕으로 다른 사람의 성장을 돕는 사람으로 기억으로 기억되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