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말을 듣는 기자는 부끄럽다. 인터넷,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등 뉴미디어의 발달로 신문의 기능을 상당 부분을 잃었기 때문이다. 속보성이 떨어졌고, 균형 깨진 정보들이 지면에 떠돌아다닌다. 오타와 비문, 잘못된 띄어쓰기는 계속 늘고 있다. 교열기자 한두 명이 모든 지면을 보는 신문사가 여럿이니 그럴 만도 하다. 신문으로 우리말 공부를 한다는 건 옛날이야기가 됐다.
“무슨 당에도 상관이 없고 상하귀천(上下貴賤)을 달리 대접하지 아니하고 조선 전 국민을 위하여 무슨 일이든지 대언하여 주려 함이다. 정부에서 하는 일을 백성에게 전하고 백성의 정세를 정부에 전할 터이니, 백성이 정부 일을 자세히 알고 정부에서 백성의 일을 자세히 알면 피차에 유익한 일이 많을 터이고 공평한 마음과 의심하는 생각이 없어질 것이다.”
1896년 4월 7일에 발간된 독립신문의 창간 논설 중 일부분이다. 국민을 차별하지 않고 정부와 국민 사이에 정보가 원활하게 소통되도록 하는 것이 신문의 역할임을 밝히고 있다. 121년이나 지난 지금까지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내일은 제61회 신문의 날이다. 1967년, 독립신문의 창간일을 신문의 날로 정해 해마다 신문의 의미와 중요성을 되새기고 있다. 올해 신문의 날을 맞아 정한 표어는 ‘신문을 펴는 즐거움, 정보를 향한 설레임’이라고 한다. 읽는 즐거움을 주는 매체가 신문이라는 점을 대구와 운율 형식에 맞춰 잘 표현한 작품이라는 심사위원들의 설명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그런데 아쉬운 마음이 든다. ‘설레임’이라는 틀린 표기 때문이다. 마음이 가라앉지 않고 들떠서 두근거리는 상태는 ‘설렘’이다. 친구와 떠나기로 한 배낭여행 날을 기다리면서, 연인을 만나러 가면서, 보고 싶었던 영화를 보면서 설렌다.
하지만 모 회사의 아이스크림 때문인지 많은 이들이 바르지 않은 말 ‘설레임’을 쓰고 있다. ‘설레이다’라는 동사가 없으므로, 명사형 ‘설레임’은 당연히 존재하지 않는다. ‘설래다’ 역시 바르지 않은 표기로, ‘설레다’만이 표준어이다. 다만 상표와 같은 고유명사와 문학작품 속 ‘시적 표현’의 경우 우리말법의 잣대로 따질 수 없으므로 논외이다.
그래도 헷갈린다면 동사를 명사로 만드는 방식을 알면 명확해지겠다. 어간에 받침이 있으면 ‘-음’을, 받침이 없으면 ‘-ㅁ’을 붙이는 게 방법이다. ‘설레임’은 기본형이 ‘설레다’이므로 ‘-ㅁ’만 붙이면 된다. ‘이’ 모음이 들어갈 이유가 없다. 그러니 올바른 명사형은 ‘설렘’이다.
독자에게 신문을 펴는 즐거움을 선사하고 바른 정보만을 담아 독자 가까이 다가가야 할 언론의 사명은 영원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 바른말 사용으로 신문의 품격을 높이는 것은 기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