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여성인물사전] 102.유영준(劉英俊)

입력 2017-04-26 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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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약자에 대한 차별과 싸운 醫師

▲조선여의사들. 뒷줄 오른쪽 첫 번째가 유영준(기독신보 1926. 12. 8.)

1892년 평양에서 태어난 유영준(劉英俊· 1892~?)은 1910년 정신여학교를 졸업하고, 중국의 베이징(北京)여학교 모정서원을 다니면서 안창호 등 민족운동가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귀국하여서는 3·1만세운동에 참가한 뒤 도쿄여자의학전문학교와 일본적십자병원에서 의학 공부를 하였다. 이때 민족사회와 여성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갖고 도쿄여자유학생친목회 회지 ‘여자계’를 나혜석 등과 함께 만들며 여자 유학생들을 이끌었다. 방학 때는 귀국하여 주로 여성의 의식을 일깨우고 위생 관념을 강조하는 강연을 하며 전국을 순회하였다.

1925년 귀국하여 김약수, 이여성 등이 도쿄에서 조직한 사상 단체인 일월회(一月會)의 발회 기념강연에서 ‘무산계급과 교육문제’라는 강연을 하는 등 사회주의 운동에 관심을 보였다. 이화여전 교의로 있다가 산부인과 병원을 개업하여 여성 진료에 앞장섰다. 대홍수 때는 뚝섬, 마포 등지에서 이재민 구호 활동에도 나섰다.

1927년 5월 근우회 창립에 최은희, 황신덕과 함께 주역이 되어 1929년까지 중앙집행위원과 정치연구부 상무위원 등을 맡아 활동하였다. 경성여자소비조합 감사장도 담당한 그는 호남의 부호 김종필과 혼인하여 첫딸도 낳고 다복한 가정생활에도 충실하였다.

1934년 말에는 안재홍, 이종린, 여균 등과 함께 여자의학전문학교를 설립하기 위한 5인의 교섭위원으로 활약하였다. 그를 믿고 응원한 시댁에 힘입어 경성여자의학강습소 설립재단을 발족하고 1938년 여자와 어린이 전문 여의사 양성기관인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로 승격시키는 데 기여하였다. 이때 길정희, 차미리사, 김활란, 조신성 등 여성운동가와 여의사 10여 명이 발기준비위원으로 함께 하였다.

일제 시기의 그는 스스로 중도파임을 강조하면서, 자유와 정의를 앞세우고, 차별과 불의에 맞서 싸웠다. 특히 온돌과 김치 등 전통문화를 아끼고 사랑하였으며, 여성을 위한 주택 개량, 식사 개선에도 과학적 처방과 제안을 쏟아냈다. 젊어서 오히려 좌우에 치우치지 않는 균형과 조화, 통합과 일치, 온건함 속에 합리성을 추구하였던 것이다.

광복 후 격동하는 사회에서 유영준은 사회적 약자와 소외된 사람들을 위해 조선부녀총동맹의 중앙집행위원장 등을 맡아 치열한 활동에 뛰어들었다. 1946년에는 민주주의민족전선의장단 부의장 및 사회정책연구위원으로 “민족혁명에 있어서 민족의 절반을 차지하는 여성의 역할”을 강조하는 한편 쌀 투쟁 등 민생고 해결에 앞장섰다.

1947년 미 군정의 탄압이 거세지자 월북하여, 여성과 노동자의 살 길을 찾아보고자 했다. 1948년 8월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등 고위직에 있다가 1962년 고령으로 요양소 생활을 하였다고 한다.

공동기획: 이투데이, (사)역사 여성 미래, 여성사박물관건립추진협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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