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가 동료 교수가 합죽선 백선(白扇) 한 자루를 들고서 나를 찾아왔다. 선면에 글씨를 써 달라는 떼를 쓰기 위해서이다. 적당히 떼를 쓰게 한 다음, 나는 ‘心淸自然凉(심청자연량)’이라는 구절을 전서(篆書)로 써 주었다. “마음이 맑으면 절로 시원하다”는 뜻이다. 그날은 유난히 글씨가 잘 써져서 정말 멋진 선면작품(扇面作品)이 나왔다. 동료 교수는 날을 잡아 거창하게 한턱을 내겠다고 하면서 부채를 들고 기분 좋게 내 방을 나갔다.
며칠 후, 그 교수를 구내식당에서 만났다. “김 교수님! 날더러 이 부채를 어떻게 하라고 이런 구절을 써 주셨습니까?” 만나자마자, 부채를 펴 보이며 따지고 들었다. “왜요?” 내가 물었다. 그가 큰 목소리로 답했다. “아니, 쓰신 구절이 ‘心淸自然凉’, 즉 ‘마음이 맑으면 절로 시원하다’라는 뜻이고 보니 이 부채를 사용할 수가 없습니다. 이걸로 부채질을 한다는 것은 곧 덥다는 얘기이고, 덥다는 것은 제 마음이 맑지 못하다는 뜻인데, 그럼에도 제가 이 부채를 사용함으로써 만천하에 ‘나는 마음이 맑지 못한 사람입니다’라는 사실을 공표하고 다녀야 되겠습니까?”
나는 포복절도(抱腹絶倒)라는 말을 실감하면서 배를 움켜잡고 웃었다. 그 교수도 물론 식당이 떠나갈 듯이 껄껄대고 웃었다. 이어서 그는 말했다. “이 부채는 집에다 모셔두고 마음을 수양하는 자세로 바라보기만 할 테니 실지로 사용할 부채 하나 다시 써 주세요.” 며칠 후에 나를 다시 찾은 그는 부채 하나가 아니라, 여러 자루의 합죽선에 담은 선면작품을 들고 나갔다. 한문에 대한 멋진 해독력과 사람을 기분 좋게 하는 호탕한 너스레가 그에게 그렇게 많은 선면작품을 안겨 준 것이다.
요즈음엔 이런 멋을 함께 나눌 만한 사람이 없다. 그저 에어컨 앞에서 냉커피 마시자는 사람만 있다. 진정으로 합죽선 선면작품의 멋을 아는 사람을 만난다면 자진해서 부채를 선물하고 싶은 심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