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부채, 즉 秋扇은 ‘버림받은 여자’를 뜻하는 말임을 앞서 살핀 바 있다. 그러면 겨울 부채. 즉 冬扇은 뭘까? 더 가혹하게 버림받은 여자를 뜻하는 말일까? 아니다. 불타는 사랑을 상징하는 말이다.
조선 선조 때의 유명한 시인이자 통쾌한 풍류객이었던 백호(白湖) 임제(林悌·1549∼1587) 선생은 해학적인 풍자시도 많이 남겼지만 아름답고 절절한 사랑의 시도 많이 남겼다. 기생 황진이의 무덤 앞에서 황진이를 기리는 시를 지었다가 벼슬자리에서 쫓겨난 그였으니 사랑의 시를 남긴 건 당연하다. 다음과 같은 시가 그의 대표적인 사랑의 시이다.
“한겨울에 부채를 준다고 괴이하게 여기지 마라./ 너는 나이 어려 아직 잘 모르겠지만/ 임 그리워 한밤중에 가슴에서 불이 일 때면/그 더위, 그 열기는 유월 무더위에 비길 바 아니니라.”[莫怪隆冬贈扇妓 爾今年少豈能知 相思半夜胸生火 獨勝炎蒸六月時]
어린 기생에게 준 시이지만 참으로 멋진 사랑의 고백을 담은 시이다. 이런 열정을 담아 사랑을 고백하면 그 고백을 받아들이지 않을 여인이 없을 것 같다. 사랑은 진실이다. 이 시는 결코 허풍이나 과장이 아니라, 절절하게 끓는 마음을 그대로 전달하는 진실이다. 다듬어진 매너로 전하는 사랑만이 사랑인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투박한 열정이 더 깊은 사랑이고, 촌스러운 진실이 더 절절한 사랑이다. 秋扇의 부정적 의미를 이처럼 반전시켜 겨울 부채를 불타는 사랑으로 표현한 시인의 시적 감수성이 놀랍다.
선인들은 부채 한 자루에도 이처럼 짙은 사랑을 담았다. 올해는 5월이 윤달이라서 단오를 두 번 맞았다. 올여름은 유난히 덥다. 단오에는 으레 부채를 선물했다. 에어컨에만 의존하지 말고 부채 문화를 되살렸으면 좋겠다. 나무 그늘에 앉아 부채질을 하던 그때는 에어컨이 없어도 행복하고 여유가 있었다. 올여름엔 멋진 합죽선 한 자루 들고 이 더위를 쫓는 여유를 가져보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