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65) 전 대통령에게 뇌물을 건네거나 주기로 약속한 혐의로 기소된 이재용(49) 삼성전자 부회장과 박영수 특별검사팀이 항소심에서 다시 맞붙었다. 양측은 박 전 대통령과 이 부회장 사이에 묵시적 청탁이 오갔는지와 안종범(58) 전 청와대 정책조정수석 업무수첩의 증거능력을 두고 공방을 벌였다.
서울고법 형사13부(재판장 정형식 부장판사)는 12일 이 부회장 등 삼성 전·현직 임원 5명의 첫 공판기일을 열었다. 1심은 지난 8월 최순실(61) 씨 딸 정유라(21) 씨의 승마지원금 73억 원과 한국동계스포츠영재센터에 준 16억원 등 89억원을 뇌물로 보고, 이 부회장에게 징역 5년을 선고했다.
◇ 특검 "개별현안도 청탁" vs 삼성 "승계작업 없었다"
이 부회장 측은 청탁 대상인 '승계 작업'이 존재하지 않았다며 무죄를 주장했다. 변호인단은 "승계와 승계작업은 명확히 구분된다"라며 "이 부회장의 승계는 당연히 예정돼 있었지만 승계작업은 없었다"고 했다.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 등 개별 현안에 대한 청탁은 없었다면서도 승계작업이라는 포괄적 현안에 대해 묵시적 청탁을 인정한 1심 판결이 모순이라고도 했다. 변호인단은 "불충분한 간접사실만으로 승계작업이 존재한다고 판단했다"라며 "1심 판단의 상당 부분을 김상조 공정거래위원회장 증언에 의존했다"고 지적했다. 이 부회장은 이미 충분한 지분을 확보해 추가 조치 없이도 경영권 승계가 가능했다는 것이다.
반면 특검은 "경영권 승계작업은 지분 비율로만 좌우되는 게 아니다"라며 "삼성 지배구조는 기본적으로 순환출자와 금산분리라는 법률적 특혜로 유지되는 구조였다"고 했다. 이후 순환출자가 금지되고 금산분리 강화 입법 움직임이 일면서 기존 삼성 지배구조가 유지될 수 없었다는 것이다. 특검은 "지배구조를 개편해야만 이 부회장이 삼성그룹을 온전히 승계받을 수 있는 상황이었다"라며 "이건희 회장 유고시 발생할 막대한 상속세 문제까지 해결해야 했다"고 주장했다.
특검은 1심이 부정한 청탁을 좁게 해석해 미르·K스포츠재단 출연금에 대해 무죄를 내린 부분도 지적했다. 특검은 "박 전 대통령이 공익활동으로 공인받지 않은 단체에 현금을 주라고 했을 때 돈을 줄 이유는 직무상 이유밖에 없다"라며 "독대라는 은밀한 방법으로 돈을 제공했다"고 했다.
◇안종범 업무수첩 증거능력 두고 공방..."증거능력 존재" vs "전문법칙 위배"
안종범(58) 전 청와대 정책조정수석의 업무수첩의 증거능력을 두고도 공방을 벌였다. 변호인단은 1심에서 유죄 증거로 사용한 안 전 수석 업무수첩의 증거능력을 인정할 수 없다고 했다. 안 전 수석은 이 부회장과의 독대 이후 박 전 대통령으로부터 들은 말을 수첩에 적었다. 이 수첩에는 정 씨에 대한 삼성의 승마지원 관련 박 전 대통령의 구체적인 지시가 적혀있다. 앞서 1심은 업무수첩 내용과 상관없이 적어놓은 사실 자체를 인정하는 정황증거로 채택했다. 이는 1심 판단의 주요 근거가 됐다.
변호인단은 1심이 간접증거인 안 전 수석의 업무수첩을 직접증거처럼 사용했다고 주장했다. 변호인단은 "안 전 수첩은 전문증거로서 증거능력이 없다"라며 "안 전 수첩을 핵심 증거로 대통령과 이 부회장이 대화를 나눴다고 인정하고 유죄로 인정한 원심판결은 위법하다"고 했다.
전문법칙은 다른 사람에게서 들어서 어떤 내용을 알고 있다는 증언이나 증거(전문증거)는 원칙적으로 증거능력을 인정할 수 없다는 원칙이다. 그 내용을 직접 말한 당사자를 법정에 불러 직접 신문한 뒤에야 증거능력을 인정할 수 있다. 하지만 당사자인 박 전 대통령은 1심 재판 당시 3차례 증인신문 출석 요구에도 끝내 이를 거부했다.
반면 특검은 안 전 수석 업무수첩에는 전문법칙이 적용되지 않는다고 반박했다. 특검은 "증거물인 서면에는 전문법칙이 적용되지 않는다"라며 "1심은 안 전 수석 수첩을 증거물인 서면으로 인정하고 기재내용과 안 전 수석 등의 법정 증언 등을 종합해 사실관계를 인정한 것"이라고 했다.
다음 공판기일은 19일에 열린다. 양측은 이날 정유라 씨 승마지원 관련 프리젠테이션 공방을 벌일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