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1세기 떠도는 카스트 제도의 망령...인도 기업은 글로벌로 나아가는데 신분 관행은 여전히 제자리
카스트 제도는 브라만, 크샤트리아, 바이샤, 수드라 등 4개 계급과 계급 외의 불가촉천민으로 구성된다. 같은 계급이 아닌 사람들끼리는 결혼을 허용하지 않고, 카스트 제도 안에서 정해진 직업도 대물림될 정도로 강력한 계급화를 특징으로 한다. 1947년 카스트 제도는 공식적으로 폐지됐으나 여전히 인도 사회 전체를 움직이는 데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카스트 제도가 인도의 성장에 발목을 잡고 있다는 점이다. 2016년 포춘인디아는 인도 100대 기업의 최고경영자(CEO) 중 4명만이 카스트 제도에서 상위 계급이 아닌 신분이었다고 지적했다. 공공 부문까지 포함해도 불가촉천민이 CEO로 있는 기업은 없다. 전직 외교관 출신인 샤드 타루르는 “카스트 제도가 사라진 지 80년 가까이 됐음에도 불구하고 불가촉천민은 오늘날 인도 기업에서 거의 보기 힘들다”며 “불가촉천민이 인도 인구의 25% 가까이 차지한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주목할 만한 현상”이라고 밝혔다.
불가촉천민들은 기본 교육에서부터 차별을 받는다. 아무리 뛰어난 두뇌를 가진 인재여도 출세길이 막혀 있다는 의미다. 인도 자와할랄네루대학교의 서린더 싱 주드흐카 사회학 교수는 “고등교육 기관에서 불가촉천민 학생들을 차별한다는 주장은 공공연한 사실이며 불가촉천민에 향한 반감은 매우 뿌리 깊다”고 설명했다. 카스트 제도를 전문으로 연구하는 델리 경제대의 아쉬위니 데쉬판데 교수는 100명 이상의 불가촉천민 학생들에게 구직 면접을 봐줄 기회가 있었는데 그중 유창하게 영어를 구사하는 학생은 거의 없었다고 밝혔다. 이뿐만 아니라 적절한 보디랭귀지나 사용법이나 면접용 복장 역시 부족했기 때문에 구직을 원하는 학생 스스로 본인이 선택받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고 덧붙였다.
인도 최대 타이어 생산업체인 아폴로타이어의 마타 데스몬드 인적자원 책임자는 “교육에 접근성이 제한된다는 의미는 기업에서 이들이 선택될 확률이 낮다는 뜻”이라며 “면접이 채용의 주요 방법으로 사용되는데 구직자의 의사소통 기술을 보려는 것이며 고등 교육 수준 이상의 사람들이 유리하다고 본다”고 분석했다. 데쉬판데 교수는 “인도 기업이 세계화되고 있지만, 고용 관행은 이를 따라잡지 못하고 있다”며 “카스트 제도는 앞으로 끈질기게 인도 사회를 따라다닐 것이며 결정적 해결 방안이 없는 한 문제는 심화할 것”이라고 관측했다.
결국, 자국에서 기회를 잡지 못한 불가촉천민과 서민 계급, 상인 계급 등은 탈(脫)인도를 감내한다. 2014년 기준으로 미국에서 취업전문 비자인 H-1B 비자를 발급받은 사람 5명 중 3명이 인도의 IT 아웃소싱 기업 직원이었다. 미국 안보부와 이민국에 따르면 인도의 대표적인 IT 아웃소싱 기업인 타타컨설턴시서비시스(TCS), 인포시스, 위프로에서 2014년에 1만2000명 이상의 직원이 H-1B 비자를 발급받았다. 미국 실리콘밸리에서 인도 출신 CEO들이 미국 시민권 확보에 매진하는 이유도 카스트 제도 때문으로 풀이된다. 실리콘밸리를 쥐락펴락하는 구글과 마이크로소프트(MS)의 CEO 모두 인도 출신이다.
이 때문에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반이민 정책에 가장 타격을 받는 것도 인도 IT 인재들이다. 대선 기간 트럼프는 “H-1B 비자를 영원히 끝내겠다”고 공언했다. H-1B 비자는 미국 내 외국인 전문직 취업비자로 기술을 가진 외국인이 미국에서 체류하며 일할 수 있도록 허용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비자는 한 번 발급받으면 3년 동안 유효하고 이후에 추가로 3년까지만 1회에 한해 갱신할 수 있다. 6년이 만료되면 1년 단위로 무제한 연장할 수 있는데 현재 트럼프는 이 규정의 폐지를 검토 중이다. 작년 초부터 트럼프 행정부는 발급 쿼터를 줄이는 등의 논의를 해왔다. 최근에는 불법체류 청소년 추방 유예 프로그램인 DACA의 폐기 결정에 순다르 피차이 구글 CEO와 사티아 나델라 MS CEO 등이 하나같이 반대 목소리를 냈다.
인도를 떠나는 인재들이 늘어나자 후진적 인도의 채용 문제를 민간에만 맡겨서는 안 된다는 자성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인도 인간개발연구소의 아미타브 쿤두 교수는 정부의 의지가 중요하다고 역설했다. 그는 다양한 계급을 채용하는 기업에서 포상금을 주는 방안을 고려해야 한다고 했다. 쿤두 교수는 “민간 기업의 85%가량이 공공 부문에 의존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며 “다양성 정책을 위반할 경우 수출 보조금, 세제 혜택 등을 받지 못하게 하는 강력한 방책이 필요한 때”라고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