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수석 총괄부회장이 사장단 인사 과정에서 자기 색깔을 드러냈다. 취임 3개월 만에 과감한 세대교체를 통해 명실상부한 ‘정의선 시대’를 연 셈이다.
이번 인사 키워드는 △순혈주의 타파 △실적중심 평가 △열린 혁신 채용 세 가지로 요약된다. 우선 정의선 수석부회장 체제가 본격화되며 정몽구 회장의 최측근으로 꼽히는 인물들이 한 발 물러나게 됐다. 아주 오랜 기간 이어져 온 ‘현대차 식 순혈주의’를 타파하겠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먼저 ‘MK 오른팔’로 불리던 김용환 부회장의 일선 후퇴에 관심이 쏠린다. 이번 인사에서 현대제철 부회장으로 이동하게 된 그는 최근 10년 간 현대기아차 기획조정실, 비서실 담당 수장을 맡으며 그룹 전반 경영에 관여해왔다. 2004년 현대로템을 떠나 현대제철과 인연을 맺은 후, 2010년부터 회사를 이끌어 온 우유철 부회장은 14년 만에 다시 현대로템으로 돌아가게 됐다. 이외에도 그룹 내 연구개발(R&D) 부문을 총괄해 온 양웅철 연구개발총괄 부회장과 권문식 연구개발본부장 부회장도 일선에서 물러나 고문으로 위촉됐다.
이들은 2010년대 들어 일선에서 후퇴하기 시작한 현대정공 출신의 ‘정몽구 군단’을 대신한 인물들이다. 김용환·우유철 부회장을 비롯해 지난달 고문으로 물러난 설영흥 중국담당 부회장 역시 마찬가지다. 이번 쇄신인사에서 이들이 물러난 것은 향후 그룹 인사 시스템의 변화를 예고한다. 예컨대 신사업 전문가로 영입한 삼성전자 출신의 지영조 부사장이 이번 인사에서 1년 만에 사장단에 합류한 것도 현대차의 ‘순혈주의’의 변화를 뜻한다.
철저한 신상필벌 인사도 엿보였다. 현대차그룹은 이번 인사를 통해 정진행 전략기획담당 사장을 부회장으로 승진시켰다. 동시에 현대건설 부회장까지 겸하도록 했다. 그가 정의선 수석부회장을 지근 거리에서 보좌하는 부회장단에 새롭게 진입했다는 면에서 행보를 주목해야 한다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계열사로 이동했다는 면에서 경영능력을 다시한번 입증해야 한다는 부담은 있지만, 김용환 부회장이 물러난 ‘2인자’의 빈 자리를 결국 정진행 사장이 대체할 것이란 전망은 그의 이력과 나이, 그리고 정의선 부회장의 신뢰 등에 근거한다.
정몽구 회장의 오랜 측근이었던 설영흥 중국담당 부회장 역시 최근 잇따른 중국사업 부진의 책임을 피하지 못했다. 연구개발본부 소속 양웅철·권문식 부회장 역시 최근 북미 시장에서 연달아 터진 리콜과 제작결함 논란에서 자유롭지 못했던게 사실이다.
아울러 지난 10월 단행한 임원인사를 포함하면 연구개발(R&D), 상품기획, 디자인 등 혁신 부문 수장을 모두 외국인으로 교체한 점도 눈에 띈다. 실력 위주의 글로벌 핵심 인재 중용을 통해 모빌리티에 집중하며 미래 핵심 경쟁력을 강화하겠다는 의지가 반영된 인사다. 신임 연구개발본부장에 차량성능담당 알버트 비어만 사장이 임명됐다. 현대차그룹이 외국인 임원을 연구개발본부장에 임명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현대·기아차 R&D 부문에 대한 글로벌 혁신과 오픈 이노베이션 전략 강화를 위한 파격 인사라는 평가다. 독일 BMW에서 고성능차 개발 총괄 책임자(부사장)로 일하다 2015년 현대차그룹에 합류한 비어만 사장은 짧은 기간 내 현대·기아차 및 제네시스의 주행성능을 세계적 수준으로 끌어 올렸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최근 루크 동커볼케 부사장을 디자인최고책임자(CDO)에, 토마스 쉬미에라 부사장을 상품전략본부장에 임명한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