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금융권 인사 키워드로 ‘여성’이 꼽혔다. 남성이 독식했던 핵심 부문에 여성이 임원으로 발탁된 것과 더불어 증권업계에서는 처음으로 여성 최고경영자(CEO)가 탄생한 영향이다. 이러한 인사는 이전보다 색다른 평가를 받지만, 달리 보면 그만큼 금융권의 ‘유리천장(여성의 고위직 승진을 막는 조직 내의 보이지 않는 장벽)’이 강했단 의미다. 여전히 임원 명단의 대부분은 남성들이 가득한 상황이라 이번 ‘우먼파워’도 결국 찻잔 속 태풍에 불과하다는 평가다.
여성들이 임원 명단에 이름을 올리기 힘든 것은 단순히 ‘숫자’만의 문제는 아니다. 금융권 여성 직원의 비율은 점차 높아지고 있다. 제윤경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금융감독원으로부터 제출받은 자료를 분석한 결과 2017년 기준 은행권 창구 직원 5만8113명 가운데 여성은 58%(3만3585명)를 차지했다. 하지만 금융그룹 여성 임원은 전체 임원의 3.9%에 그쳤다. 은행권은 “뽑을 여성이 없다”라고 항변하지만, 실제 지표는 그렇지 않은 것이다.
여성 채용을 경시하는 문화도 남성 조직이 공고히 되는 이유 중 하나다. 특히 금융업계는 타 산업군보다 채용의 투명성이 확보됐다고 여겨졌던 곳이다. 하지만 최근 불거진 은행권 채용비리 사태에서 여성 채용을 기피하는 모습이 노골적으로 드러났다. 남성 지원자와 여성 지원자의 채용 비율을 사전에 결정하거나, 고의적으로 남성 지원자에게 혜택을 주는 등의 모습이 지난해 채용비리 여파에서 나타난 것이다. 여성은 입구부터 검열을 받고 아울러, 업무를 배정하는 과정에서 남성을 보다 핵심 부서에 배치하는 영향도 배제하기 어렵다.
이러한 경향이 금융권의 고질적인 문제라면, 여성의 목소리를 더 키우는 것은 하나의 대안이 될 수 있다. 미 펜실베이니아 연구진이 과학저널 ‘사이언스’에 발표한 조사에 따르면 사회 구성원들이 고정관념이나 가치관을 바꿀 수 있는 임계점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구성 비율이 ‘25%’이어야 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어떤 관성에 익숙해져 있는 조직을 변화시키려면 ‘다른 사람들’이 전체 구성원의 25% 이상이어야 한다는 의미다. 이를 금융권 내에 접목해 반대로 해석하면 3.9%에 그친 여성 임원은 남성 위주의 보수적인 조직 문화를 바꿀 수 없는 셈이다.
결국 남성 중심의 조직문화를 깨고자 한다면 현 수준에서 여성 임원 비율을 20%포인트 이상을 더 끌어올려야 한다. 다른 선진국에선 이미 여성할당제(여성에게 일정 비율을 보장하는 제도)를 통해 남성과 여성의 ‘기울어진 운동장’을 일부 해소했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민간 영역에서 도입하지 못했다. 여성학계는 기계적으로 임원 숫자를 채우는 여성할당제를 통해 조직 내 여성 차별을 일부 해소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금융노조에서도 이를 위해 단체협약에 여성할당제를 구체화하는 방안을 고민 중이다.
여성의 사회적 진출은 결국 사회의 ‘공정성’과도 맞닿아 있다. 단순히 역차별이라고 말할 것이 아니라 “그간 우리 사회가 공정했는가”를 묻는 것이 우선이다. ‘96대 4’는 결코 공정한 숫자라고 말하기 어렵다. 금융기관은 일부 공적인 성격을 띤다는 점을 고려하면 남성 중심의 문화가 금융권 차원에서도 큰 손실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 김난주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은 “금융권 내에서 여성이 능력이 부족해서 임원에 오르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종전의 선입견에 따라 여성이 배제된 것뿐”이라면서 “우리 사회가 ‘여성 차별’ 국가라는 사회적 합의를 하고 앞으로 인식을 바꿀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