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년 경 어느 잡지에 실린 한일은행의 적금 상품 광고.
금리 대폭인상! 목돈마련저축
대체 금리가 얼마나 올랐길래 이런 광고가 나왔는지 한 번 살펴보자.
가장 단기간 저축하는 1년 만기 저축상품. 연 금리가 23.4%다. 그럼 가장 긴 기간인 5년을 저축하면? 만기시 연 이율이 30.2%다.
연이율 30.2%! 3.2%의 오기가 아니다. 월 1만 원씩 5년간 60회를 납부하면 원금 60만 원에 이자 46만300원이 붙어서 나온다.
투자기관이 망하지만 않는다면 30.2%의 수익을, 아니 위 광고에서 가장 적은 23.2%의 수익이라도 확실하게 보장하는 적금. 이렇게까지 높은 안전성과 수익성을 모두 갖춘 투자상품은 단언컨대 2019년 현재 한국에 존재하지 않는다. (혹시라도 이같은 투자상품이 현존하는데도 기자가 조사가 미비해 놓친 것이 있다면 cogito@etoday.co.kr로 제보바란다. 크게 사례하겠다.)
◇지금 이자율과 비교해보면
‘우와~ 이자율 30%’라고만 하면 잘 와 닿지가 않는다. 2019년 현재 이율과 비교해보자.
금융감독원이 운영하는 ‘금융소비자정보포털 파인’의 ‘금융상품한눈에’라는 페이지에서 현재 국내 여러 금융기관에서 출시한 금융상품 정보를 한 눈에 볼 수 있다.
현재 월 1만 원의 정액적립식으로 36개월간 저축하는 은행의 적금 상품을 찾아보자. 가장 연 이율이 높은 우리은행의 ‘스무살 우리적금’의 최고 우대금리가 3.8%라고 나온다.
심지어 아무나 3.8% 금리를 누릴 수 있는 게 아니다. 가입 요건 자체가 만 18~30세 개인으로 제한되며 △우리카드 월 10만 원 이상 사용 △인터넷, 스마트뱅킹 신규개설 △가입기간 전체 자동이체 라는 까다로운 우대 조건을 모두 지켜야만 세전 3.8%다. 이런 조건을 갖추지 못한 세전 이자율은 고작 2.7%다.
이에 반해 1970년대 당시 기사를 찾아보면 ‘목돈마련저축’은 가입 요건이 ‘월 소득 30만 원 미만의 근로자’다. 가입 이후 월 소득이 30만 원을 훌쩍 넘어도 저축 상품을 계속 이용할 수 있다. 사실상 조건이 없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2019년 3년 만기 적금 이율 최대 3.8%(온갖 우대금리 포함한 세전 이자율). 1979년 광고의 3년만기 적금 이율은 27.5%. 현재 가장 높은 이율인 3.8%와 비교해도 이율이 7.2배 차이가 난다. 퍼센트포인트로는 무려 23.7%p의 이율 격차다.
광고에 나온 한일은행이 이자를 막 퍼주는 방만한 경영을 일삼은 건 아닐까? 아니다. 한일은행은 1990년대까지 이른바 ‘조상제한서(조흥·상업·제일·한일·서울)’라고 묶여 지칭된 빅5 시중은행 중 하나였다. 한일은행은 상업은행과 1999년 합병하며 한빛은행으로 재탄생했다. 한빛은행은 2002년 ‘우리은행’이라는 이름으로 사명을 변경한다. 즉, 1979년 30.2%의 연 이자를 지급했던 한일은행과, 2019년 현재 까다로운 조건 끝에 최고우대금리 3.8%를 지급하는 우리은행은 같은 은행이다.
아무리 40년간의 시차가 있다고는 해도 이자율의 차이가 믿기지 않을 만큼 크다. 외환위기가 원인? 반만 맞는 말이다. 외환위기는 이자율 하락의 뇌관은 맞지만, 근본적인 원인은 아니다. 그럼 근본적 원인은 뭘까?
◇자본의 가격 이자, 희소성의 원리
뜬금없는 질문이지만 1000만 원의 가격은 얼마일까? “1000만 원이 1000만 원이지 돈에 무슨 가격이 있냐?”가 정답이 맞다. 다만 이것은 ‘2019년 1월 17일’ 현재의 1000만 원의 가격이 얼마냐고 물었을 때만 정답이다.
시중 은행의 연 이율이 대체로 2%라고 가정해보자. 이 경우 2019년 1월 17일의 1000만 원의 가격은, 2020년 1월 17일의 1020만원이다. 은행이 연 2%의 이자율을 지급한다는 것은 ‘2020년 1월 17일의 1020만 원’을 내고 현재 ‘2019년 1월 17일의 1000만 원’을 예금자로부터 구매하겠다는 의미다. 이자는 ‘자본의 가격’이다.
1979년과 2019년 이자율의 7배가 넘는 현격한 격차는 1979년의 자본이 지금보다 7배에 달하는 가격이 매겨질 만큼 귀중했다는 사실을 시사한다.
무엇인가 귀했다는 건 그것이 수요에 비해 현격히 모자랐다는 의미다. 35년의 식민통치. 기술력이라고 할 만한 건 독립과 함께 본토로 철수한 일본인들이 함께 가져갔고, 5년 뒤 벌어진 내전은 이 땅 위에 남아있던 모든 것을 남김없이 파괴했다.
주택, 공장, 제철소, 철도, 항만, 기술 로열티…. 국토 전체가 깨끗이 파괴되고 나니 재건을 위해서 돈 들어갈 곳은 한없이 많았다. 하지만 돈 들어갈 곳 많은 건 국민들도 마찬가지라 먹고사는데 쓰느라 저축할 돈이 거의 없다시피 했다. 지금과는 달리 은행들이 예금자들에게 ‘이자 30%까지 드릴 테니 제발 예금 좀 해주세요’라고 사정해야 할 만큼 축적 자본이 희소했던 것이다.
잘 보면 ‘목돈마련저축’은 3년 만기 이율의 27.5%중 17.2%는 은행이 지급하고, 나머지 13%는 정부가 ‘별정장려금’이라는 형태로 지급하는 상품이다. 상품 자체가 ‘정부가 마련한 제도’기 때문이다. 정부까지 보조금을 지원해가면서 예금을 애걸해야할 정도로 자본은 귀중했다.
그러니까 “아 옛날에는 저금만 해도 이자율이 20~30%였으니까 부자되기 엄청 쉬웠겠네요! 10억 원 넣으면 1년 만에 2억3000만 원 버는거네!”라는 발상은 틀린 생각이다. 그 저금할 10억 원을 가진 사람이 없어서 이자율을 20~30%까지 올려서 지급한 것이기 때문이다.
◇마이너스 금리, 다가올 미래
위의 내용을 어려운 말로 ‘자본이 축적될 수록 자본의 한계효율이 체감한다’라고 하는데, 그냥 ‘돈이 흔해질수록 이자율이 떨어진다’고 이해하면 쉽다.
이젠 돈이 흔하다. 어떤 시중 은행도 ‘제발 예금해주세요’라고 외치며 고이율의 적금상품을 제시하지 않는다. 반대로 예금자들이 ‘어디에 투자해야 안정적으로 수익을 창출할까’ 눈에 불을 켜고 찾는 상황이다. 그래서 제1금융권처럼 안정성이 확실한 곳에서는 별의 별 우대금리를 다 적용해도 연이율이 3.8%인 것이다. 이제 은행은 돈이 아쉽지 않으니까.
물론 잘 찾아보면 현재도 ‘브라질 펀드’ 같은 30%에 가까운 수익을 보장해주는 상품이 있기도 하다. 근데 이건 그냥 원금손실도 발생할 수 있는 ‘하이리스크 하이리턴’ 상품이라 1979년의 목돈마련저축과는 완전히 다른 상품이다. 진정한 의미의 ‘슈퍼하이리턴’을 추구한다면 예나 지금이나 경마‧경륜‧복권 등을 통해….
앞으로도 돈은 더욱 흔해질 것이다. 타국의 식민지가 되서 본국의 수탈이 발생한다거나, 또 한 번의 비극적인 내전으로 국토 전체가 풍비박산이 나지 않는 한, 자본은 계속 축적될 것이다. 그리고 돈이 쌓여 흔해지는 만큼 이자율도 계속 떨어질 것이다. 점점 떨어지다 마침내는 '0'이 될 것이고, 심지어는 마이너스까지 내려갈 수도 있다.
먼나라 이웃나라 일본의 금리가 마이너스까지 내려간 건 ‘잃어버린 10년’ 탓이 아니고, 아베노믹스의 통화정책 탓은 더더욱 아니다. 아베노믹스는 원인이 아니라 오히려 결과라고 봐야한다. 경제대국 일본은 자본 축적량이 너무 비대화되서 돈이 너무 흔해졌다. 심지어 자본의 가격이 음수로 내려갈 만큼.
특별한 변수가 없다면 한국도 언젠가는 제로금리가, 마이너스금리가 될 것이다. 중단기적인 상승이 있을 지라도, 장기적이고 거시적으로 이자율은 반드시 하락한다. 먼 미래엔 ‘금융’을 통해 수익을 창출하는 것이 더욱 어려워진다는 의미다.
우리가 아래와 같은 장면을 매해 연초마다 볼 수 있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