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이자 가업 '안북스' 운영하는 젊은 인쇄인 안솔티 씨 인터뷰
"세상의 모든 둘은
서로의 호칭을 정할 것이다
결국엔 정해서 그것밖엔 안 될 것이다
그럼에도 서로의 그것이 된다면
그래서 지구에 모르는 사람이 없어진다면
너를 만난 오늘부터 나의 모든 아침은
네가 없는 아침 네가 온 아침 네가 있던 아침이겠지."
지난해 10월 8일 중구 충무로4가 진양상가 3층에 위치한 '지붕없는 인쇄소' 앞 커다란 전지에 쓰여진 시 구절 중 하나다. 현수막 한가운데 큼지막하게 자리한 이 시를 쓴 작가 이름은 '안솔티'다.
그의 시는 지붕없는 인쇄소에서 진행한 전시회 '꼴'에 내걸렸다. 해당 전시회는 한글날을 기념하기 위한 청년 창작 작가들의 독자 참여로 열렸다. 꾸준히 글을 쓰고 있으나 출판 또는 전시에 대한 정보가 없어 헤매는 작가들이 십시일반 모인 것이다.
우선 평범하지 않은 '안솔티'라는 이름부터 짚고 넘어가야 했다. 본명은 안성은(26). 그는 본명보다 'sortie(솔티)'로 불리길 원했다. 솔티는 불어로 출구를 의미한다. 누군가의 감정의 출구가 되고 싶다는 희망과 본인의 감정을 글로써 표출하고 싶다는 의지가 이름에 담겼다.
최근 고려대학교 앞 인쇄소 안북스에서 솔티 씨를 만났다. 그는 '꼴'에 대해 "독립작가들이 어떤 꼴로 사는지 보여준다는 의미"라고 설명했다. 그는 지붕없는 인쇄소와 관련해 전시회 외의 활동을 한 이력이 있다. 서울시가 노후화된 세운상가 주변을 정비하고 일대 인쇄 골목을 창작인쇄산업의 메카로 재탄생시킨다는 목표로 추진한 '다시·세운' 2단계 포스터에 출현하기도 했다.
"포스터에 계신 아저씨도 금박 인쇄를 하고 계시는 분이에요. 다른 분들도 라벨 인쇄, 첨단 인쇄, 관련 학과 교수님들이시죠. 지붕없는 인쇄소가 인쇄소 상인들과 이용자간의 소통이 어려우니 그 역할을 대신 하기 위해 존재하는 공간이잖아요. 독립작가에 관심이 많으신 소장님 덕분에 포스터에도 참여할 수 있었어요."
그 역시 출판 관계자다. 전시회에 참여한 작가라는 타이틀 외에도 그의 이름 앞에는 '인쇄소 가업을 잇는 20대 여성'이라는 수식어도 붙는다. 첫 작품은 시집 '고작 사랑에 걸려 넘어진 상처치고 너무 크다'이다. 독립출판으로 책을 출간했다. 인터뷰 장소인 안북스는 솔티 씨의 부모님이 운영하는 인쇄소다.
"저는 인쇄소에서 일하면서 나도 꼭 책을 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그렇게 독립출판을 하게 됐죠. 소장님께는 지붕없는 인쇄소 공간에 독립작가들이 참여할 수 있는 프로젝트를 만들어보고 싶다고 말씀을 드렸고, '꼴'이 만들어졌죠. 저는 아마추어 작가들도 인쇄소에 부지런히 드나들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책들이 어떻게 찍히는지 보고, 자신도 언젠가는 책을 내겠다는 꿈을 키웠으면 하는 바람이에요."
◇ "인쇄는 클래식"…다시 살리고파
인쇄소 일은 소위 '몸 쓰는 일'이다. 무거운 상자를 수없이 날라야 해서 목장갑을 끼고 일하는 날이 대부분이다. 어릴 때부터 부모님을 도왔던 솔티 씨에게는 너무나도 익숙한 일이 누군가에겐 고된 일로 보이기도 한다.
"20대 여성이 정말 없더라고요. 인쇄소 관련 콘퍼런스에 가거나 관련 교육을 받을 때면 확실히 알 수 있어요. 여성이라고 해도 사장님이랑 같이 운영하게 된 사모님 정도? 완전히 인쇄소 일을 업으로 삼는 사람은 저 혼자일 때가 대부분인 거죠. 저는 어릴 때부터 배워왔으니 인턴 기간을 몇 년에 걸쳐서 길게 배운 것과 같아요."
20대 여성이라는 위치가 인쇄소 사업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물었다. 그는 "저보다 손님들에게 오히려 장점으로 작용한다"고 말했다. 인쇄 사업이 사양산업이라고 말하는 주변의 걱정에 대해서도 "인쇄산업은 클래식한 사업이다"라고 반박했다. 다만 여기서도 변화는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기존 인쇄소에 없었던 젊은 감각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인쇄소를 방문했을 때 가장 어려운 게 사장님과 커뮤니케이션이라고들 말해요. 인쇄 작업은 소통으로 이뤄지거든요. 인쇄소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시스템을 모르는 이들은 작업물을 출력에 맞게 가져오지 않아요. 또 원하는 작업을 어디서 만들어내는지도 모르죠. 자신의 작업물에 어떤 종이가 어울리는지는 더더욱 모르고요. 그러다 보니 작은 인쇄소 대신 인터넷에서 대형 업체를 검색해 요청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에요. 단가도 전혀 알지 못하는 상태로요. 제가 젊은 감각으로 나서야 한다고 생각해요. 일종의 커뮤니케이터죠."
◇ 글 나누고 추억 만들고…'말그레' 그리고 '윤문하다'
솔티 씨는 아마추어 청년 작가 모임인 '말그레'의 수장이다. 이 모임은 시와 글을 쓰고 나누는 청년 창작 동아리다. 스물세 살 겨울에 처음 만들었다. '말그레'에서는 아마추어 작가만 140여 명이 탄생했다. 수요가 늘어나면서 경상도 말그레인 '경그레'도 탄생했다. 6번의 전시회, 4번의 북콘서트, 4번의 문학의 밤을 기획하고 진행했다.
"등단하지 않는 이상 아마추어 작가들이 활동할 수 있는 영역이 별로 없어요. 심야서점은 등단하지 않아도 열 수 있잖아요. 글을 좋아하는 사람들끼리도 제법 큰 규모의 행사를 열고, 놀 거리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그는 최근 소설가 윤재성, 기획자 문희철과 글쓰기의 즐거움을 나누는 모임인 '윤문하다'의 운영진으로도 합류했다. 시와 소설과 에세이 등 여러 형태의 글을 읽고 쓰고 나누는 모임을 꾸준히 기획하고 있다.
그의 롤모델은 배우 나문희 씨와 신철규 시인이다. "저는 글 쓰는 사람으로 끝까지 살고 싶어요. 끝까지 그 일을 해내려면 나만의 변주가 계속 있어야 한다고 판단하게 됐어요. 글 쓰는 사람이 가장 피해야 하는 일이 자기복제니까요. 나문희 씨의 연기는 늘 변주가 있어요. 제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찾은 거죠. 문체는 신철규 시인을 닮고 싶어요. 제 글은 거칠고 화가 나있어요. 반면 신철규 시인의 시는 예쁘고 섬세해요. 제가 가장 못 쓰는 게 '사소한 글'이에요. 생활감이 느껴지는 신철규 시인의 글을 자주 읽곤 해요."
◇ '세컨드 라이프'가 만든 도전 정신 "그래 봤자 죽기밖에 더 하겠어?"
솔티 씨는 26년 인생을 그야말로 꾹꾹 눌러 담고 있었다. 그는 "저한테는 기회가 그리 많지 않다는 걸 느끼고 있어요"라고 했다. 이후 꽤 묵직한 고백들이 그의 입 밖으로 나왔는데, 표정은 그와 대조적으로 밝고 명랑했다.
"제 가슴 쪽에는 커다란 수술 자국이 있어요. 제 또래 중에 이렇게 큰 수술 자국이 있는 친구를 본 적이 없어요. 심장병이 있어서 수술했습니다. 아직도 수술이 남아 있어요. 남들은 안 해본 경험들이죠. 이렇게 힘든 일도 겪었는데 더 도전해야죠. 부모님도 '하고 싶은 거 할 수 있을 때 하라'라고 말씀하시고, 저를 이해해 주세요."
그는 아주 어릴 때부터 심장 기능 중 판막, 혈관, 신방, 심장이 문제가 있어 생기는 병을 앓고 있다. 원인은 알지 못한다. 판막과 혈관은 이식받았다.
치아교정을 하기 전에도 심장센터에 가서 허락을 받아야 했다. 면역성이 약해 이를 뽑으면 감염 확률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그는 "지금도 심장 부분이 조금씩 아플 때가 있다"며 "그럴 때마다 덜컥 겁이 난다. 못한 일들이 생각난다"고 했다.
"어릴 때 의사 선생님이 못 울게 했대요. 주사를 놓으려고 하면 보통 아이들이 울잖아요. 그런데 저는 너무 많이 울면 심장에 무리가 가서 죽을 수도 있으니까 너무 울면 주사를 놓지 말라고도 했대요. 어차피 주사를 맞아도 죽고 안 맞아도 죽으니까요. 몇 년 전만 해도 제 병은 검색해도 나오지 않았어요. 지금은 검색하면 나오더라고요. 이제는 수술하면 살 수 있는 병인데, 그때는 사례가 너무 없어서 의사들도 당황했던 거죠."
하지만 그는 누구보다 건강하다. 2017년 봄에는 세브란스 병원에 '이렇게 잘 커서 잘 살아내고 있다'라는 취지의 글을 써서 보내기도 했다.
"전 소아 심장병이어서 지금도 어린이 병동에 가요. 그런데 심장병원 어린이 병동은 늘 조용해요. 웬만한 어린이 병동은 늘 시끄러운데, 심장병원은 어린이 병동 아이들은 잘 울지 않아요. 부모님들도 애들이 잘못하다간 죽을 수도 있으니까 늘 우울한 표정을 하고 있어요. 속상하죠. 이 아이들도 크면 저처럼 평범하게 살아나갈 수 있다고 말해주고 싶어요."
솔티 씨의 부모님이 언제나 그의 도전을 반기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남들보다 머리 하나 작았지만, 동네를 휩쓴 골목대장으로 자랐다. 그는 "부모님은 아파도 나가서 놀라고 내보내고 하기 싫다고 떼써도 받아주지 않았다"고 했다. '싫어도 해야지'라는 말은 못이 박히게 들었다. 약 먹고, 주사 맞는 일은 싫어도 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대신 어떤 옷을 입고 어떤 머리를 하는지 일절 관여하지 않았다. 덕분에 속썩이는 평범한 딸로 성장했다. 그의 부모님은 종종 그에게 '말썽 피워줘서 고맙다'고 말하곤 한다.
"저는 당차야 살아남을 수 있었어요. 부모님이 집에만 있으라고 했으면 저는 오히려 죽었을지도 몰라요. 밖에 나가서 뛰어놀고 하다 보니 더 튼튼해졌어요. 도전하지 못하는 사람들 보면 안타까워요. 그래 봤자 죽기밖에 더 하겠느냐고 말하고 싶어요. 실패해도 괜찮아요. 조금 창피한 것뿐이잖아요. 안 할 이유가 없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