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중독 마케팅에 빠진 한의원들…전문가들 "치료 효과 기대 어려워"
기자는 학생 시절 '게임중독'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프로게이머를 준비하면서 하루에 5시간 이상 게임을 한다고 말하자, 도덕 선생님이 자체적으로 진단을 내려준 것.
그는 폭력성과 무기력함으로 일상생활이 어려울 것이라며, 게임을 많이 하면 정신적으로 문제가 생긴다는 조언까지 친절하게 덧붙이기도 했다.
그로부터 14년 뒤인 지금, 한의원들이 게임중독 진단으로 바쁘다.
상당수 한의원이 WHO(세계보건기구)의 게임중독 질병코드 이슈에 발맞춰 포털사이트에 게임중독 관련 글과 광고를 집중적으로 게재하고 있다. 블로그 글만 1000여 개가 훌쩍 넘는다. 이른 바 '게임중독 마케팅'이다.
대부분 “건강을 위해 게임을 그만해야 한다”, “게임중독은 공부에 방해가 된다” 등의 논리를 펴며 침과 한약, 심리상담으로 게임중독을 치료할 수 있다는 내용이다. 특히 한의를 활용한 게임장애 치료는 강남, 노원 등 교육열이 높은 학군을 중심으로 빠르게 확산되고 있는 모습이다.
몇몇 한의원은 '게임중독 증세를 보인 한 학생이 한방 치료를 받은 뒤 성적이 급상승했다'라는 극적인 사례까지 글에 담았다. 수험생 부모를 겨냥한 것이 분명해 보였다. 하지만, 진단 기준이나 치료 원리에 대한 설명은 좀처럼 찾기 어려웠다.
'침이나 한방으로 게임중독을 치료할 수 있다.' 이들 한의원은 도대체 어떤 근거로 이같은 주장을 하고 있을까.
기자는 온라인에서 게임중독 마케팅을 하고 있는 A한의원을 찾았다. 게임으로 생긴 주의력 결핍이나 집중력ㆍ신체 기능 저하를 침과 한약으로 회복시켜 줄 수 있다고 주장한 곳이다.
진료는 문진으로 시작했다. 게임중독 증상이 있는 것 같다며 한의사에게 "매일 컴퓨터를 오래 하고 주말에도 게임을 4시간 이상 할 때가 있다"라고 말했다.
A한의원의 한의사는 게임이나 컴퓨터를 하다 밥을 굶는지, 결근이 잦은지, 컴퓨터를 하다보면 현기증이 오는지, 목과 어깨결림, 종아리나 다리에 경련이 올 때도 있는지를 물었다. "목이 뻐근할 때가 종종 있지만, 나머지는 아니다"라고 답했다.
한의사는 “그렇다면 게임중독은 아니다"라면서 "중독이라고 하면 일상생활이 사실상 불가능해야 한다. 수면 시간이 줄고, 끼니도 거르며 출근과 퇴근 구분이 안 되어야 한다”라고 말했다. 게임을 오래 하는 것을 넘어 사회생활을 못 하는 수준이어야 게임중독이라는 것. 이어 "컴퓨터로 작업을 하면 몸이 긴장하고 스트레스도 많아지니 침으로 완화시켜주겠다"며 자연스럽게 침 치료를 권했다.
중요한 것은 인터넷 글과 광고처럼 한의학으로 게임중독을 치료할 수 있느냐의 여부다. 한의원에서 게임중독을 치료할 수 있는지 물었다.
그는 “어렵다”라고 대답했다. 광고와는 사뭇 다른 대답이었다. 한의사는 “침과 한약으로 ‘중독’자체를 치료할 수는 없고 부수적인 현상들을 완화시켜주는 것”이라면서 “게임을 오래해서 발생하는 목‧어깨의 근육 뭉침, 소화불량, 두통 등을 해소시켜준다”라고 설명했다.
침과 한약으로 게임중독을 치료할 수 없다면 인터넷에 게시한 내용은 '과장 광고'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일부 한의원은 게임중독 상담차 방문한 사람들에게 치료와 크게 관련없는 침과 한약을 권하며 부수적인 수익을 올리고 있었다.
대한한의사협회는 이같은 한의원들의 게임중독 마케팅을 어떻게 보고 있을까. 협회 측은 "극단적 표현(최고, 최대, 확실한, 100% 치료 등)으로 심의를 통과하지 못한 광고 말고는 한의원에 따로 말 할 수 있는 것은 없다"라는 입장을 밝혔다. 또 "게임중독이 한의학으로 치료가 가능한지 공통의 의견은 별도로 없다"라고 덧붙였다.
정신의학과와 같은 양의학에서는 ‘한의학으로 게임중독을 치료하는 것은 말이 안 된다’라는 입장이다.
하지현 건국대학교병원 정신의학과 교수는 “침과 한의학으로 게임중독을 치료할 수 있다는 말을 믿지 않는다”라고 단언했다. 익명을 요청한 경기도의 한 대형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역시 “중독은 뇌 도파민 회로의 기능이상을 동반하는 정신행동장애인데, 침이나 한약과 같은 한의학으로는 치료에 한계가 있지 않겠냐”라고 지적했다.
물론, 한의학계 내부에서도 '게임중독' 치료에 대한 회의적인 시선은 다수 존재한다.
분당에서 한의원을 운영하는 이모(31) 씨는 “한의학으로 게임중독을 치료할 수 있는지 선행연구가 부족한 상황”이라면서 “드물게 신경정신과에 특화된 한의원이 상담사를 끼고 상담치료를 해 신경 안정과 스트레스를 줄일 수는 있지만, 이것이 ‘한의학의 효과’라고 보기는 어렵다”라고 의견을 밝혔다.
그렇다면 왜 학부모들은 한의원을 게임중독 치료의 해법으로 선택하고 있을까.
고3 수험생을 둔 서울 노원구의 박모(48) 씨는 "게임이 문제라고 생각하지만, 정신과를 찾아 상담하거나 치료할 경우 자녀에게 기록이 남는 것을 우려할 수밖에 없다"면서 "이 때문에 정신과보다는 한의원을 대안으로 선택하는 것"이라고 배경을 설명했다.
다시 말해, 새로운 수익원을 찾고자 하는 일부 한의원과 게임으로 학업 부진을 겪는 자녀를 가진 학부모들의 수요가 맞아 떨어진 게 한의원 게임중독 마케팅의 실체라는 것.
유명 게임 팟캐스트 ‘겜덕비상’ 진행자이자, 현직 한의사인 강동민 씨는 “한방이든 양방이든 심리 상담치료는 게임중독을 완화시키는데 도움이 될 수 있겠지만, 최근 한의원의 게임중독 마케팅은 일부 한의원이 유행에 맞춰 수익을 올리려는 상술로만 보인다”라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