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對韓 경제보복' 파장…외교싸움에 멍드는 韓경제
국내 재계가 또다시 ‘고래싸움’에 휘말렸다. 미·중 무역 전쟁에 이어 일본의 반도체 핵심 소재 등 3개 품목의 한국 수출 규제 파장이 어디까지 확산될 지 가늠할 수 없는 상황에서 우리 정부는 사실상 속수무책이다. 재계에서 ‘불확실성 조차 불확실해졌다’는 불만이 고조되는 이유다.
재계는 양국 경제인들이 머리를 맞댄 지 일주일도 안 돼 한일 관계가 경색 국면에 접어들면서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지난달 26일 한국경영자총협회는 ‘기업에서 바라본 한일관계 토론회’를 열고, 한일 관계 개선을 위해 기업 간 교류 확대가 필요하다는 데 뜻을 같이했다.
당시 손경식 회장은 “최근 들어 한일 경제협력 관계에 불안감이 조성되고 있는바, 지금이야말로 한일 양국 경제인들과 기업 간에 더욱 활발한 경제·문화·인적 교류를 통해 신뢰와 협력 관계를 확인하고 양국의 전통적인 우호적이고 동반자적인 관계 회복에 기여해 나가야 할 때”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같은 말이 무색하게 양국의 갈등은 최악으로 치닫고 있다.
경총 관계자는 “보호무역주의가 확산하고 있는 과정에서 또 한 번 이같은 이벤트(일본의 수출 규제 강화)가 벌어졌다. 보호무역주의 기조 자체를 기업이 바꿀 수 있는 여건은 아닌 것 같다”며 “기업들은 기본적으로 경쟁력을 높이는 노력을 해야 하고, 정부 차원에서는 기업 경쟁력 강화를 위해 규제 완화 등의 조치를 서두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미·중 무역분쟁의 직격탄과 가격하락·수급불균형으로 고전하고 있는 반도체 업계의 걱정도 날로 깊어지고 있다.
한국무역협회 국제무역연구원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 반도체 수출은 전년 동기 대비 22.4% 감소한 476억 달러로 추정된다. 이 가운데 미·중 무역분쟁 여파로 중화권 수출은 26.5% 감소했다.
올해 하반기 반도체 수출도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19% 감소하고, 연간으로는 작년 대비 21.1% 줄어들 것으로 전망된다. 여기에 한일관계 변수까지 생기면서 반도체 수출 감소폭은 더 커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국내 반도체 제조사들은 재고 비축, 국내산 대체 및 공급처 다양화 등으로 당장의 재료 수급에는 대응할 수 있다.
더 큰 걱정은 중장기적 전방산업 침체다. 미국과 중국의 무역분쟁이 잠시 숨 고르기에 들어간 와중에 한일 갈등이 불거지면서 또 다른 경제 불확실성 변수로 등장한 것이다.
영국투자은행 바클레이스는 화웨이에 대한 제재 등 기술 분야 갈등으로 하반기 반도체 경기 반등을 기대하기 어려워졌다고 지적했다. 노무라는 반도체 수출이 3분기까지 악화할 것이라고 분석했다. S&P는 최근 SK하이닉스 신용등급 전망을 ‘긍정적’에서 ‘안정적’으로 낮춘 상황이다.
기업들은 정부만 바라볼 수밖에 없는 형국이다. 통상 마찰이 빚어진 단초가 일제 강제징용배상이라는 외교문제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부는 사실상 속수무책인 상황이다.
산업통상자원부는 세계무역기구(WTO)에 제소할 방침을 밝혔지만, 결과가 나오기까지는 2년 정도가 소요된다. 국내 반도체 업체들의 일본산 핵심소재 재고는 2~3개월분에 불과하다.
특히 일본 마이니치신문 등은 일본 정부가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분야 소재 수출 규제 제품을 더 확대할 계획이라고 보도해 일본의 압박은 향후 더욱 거세질 전망이다.
그런데도 강경화 외교부 장관은 일본의 경제보복에 대해 “앞으로 상황을 보면서 후속대책을 연구해야 할 것 같다”고 언급하고 청와대는 이틀째 침묵하는 등 정부가 기업들의 절박감을 체감하지 못하고 있다.
오준범 현대경제연구원 선임연구원은 “기업 입장에서 할 수 있는 것은 사실 별로 없다. 소재 품목을 국산화해야 하지만 단기적으로 할 수는 없는 일이다”라고 설명했다.
이어 “먼저 정부 실무자들 간 협의가 이뤄져야 한다. 또한, WTO 원칙에 위배되는 사안인지도 살펴보며, 관련 분야에서 협의체를 만들 수도 있다”면서 정부의 역할을 강조했다.
배상근 전경련 전무는 “양국 정부는 선린우호 관계를 바탕으로 미래 공동번영을 위해 조속히 갈등 봉합에 나서주기를 촉구한다”며 “우리 경제계도 경제적 실용주의에 따라 양국 경제의 협력과 발전을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