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 법대 교수
거슬러 올라가 보면, 박근혜 정부가 위안부 문제에 관한 일본 정부의 책임을 집요하게 추궁하자 일본 정부는 한일 간 통화 스와핑을 일방적으로 파기하는 경제보복을 단행했다. 일본의 보복과 미국의 종용으로 박근혜 정부는 위안부 협상을 타결했지만, 문재인 정부는 일본과 아무런 협의나 통보도 없이 바로 그 합의의 핵심인 화해치유재단을 일방적으로 해산했다. 야당으로서는 위안부 합의가 1965년 한일협정과 마찬가지로 굴욕적 협상이라고 비난할 수 있지만, 집권한 후 아무런 외교적 대책도 없이 기존 합의를 파기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위안부 합의 파기에 이어서 지난해 일본 기업의 강제징용에 대한 손해배상책임을 인정한 법원 판결이 나오고 그 판결 집행을 위해서 일본 기업의 한국 내 자산 압류·매각이 진행되자, 일본 정부의 대응 조치, 즉 경제보복은 이미 예고되었던 것이다. 일본 정부가 오래전부터 전문가들과 함께 한국 산업의 취약점을 찾아서 가장 잔인한 보복조치를 검토하는 동안, 우리 정부는 기업 적폐 청산과 지배구조 개선에만 몰두해왔다. 우리는 일본에 비해 상대적으로 약자의 지위에 있는데, 경제보복에 대한 아무런 대비도 하지 않고 있다가 이제야 허둥지둥 대책을 검토하는 것은 부끄럽고 무책임한 일이다.
국제사회는 정글과 마찬가지로 힘, 즉 군사력과 경제력에 의해 좌우되지만, 일본은 특히 강자에게 아부하고 약자에게 잔인한 속성을 갖고 있다. 이것은 아베 신조나 도널드 트럼프의 독특한 성향이 아니라, 그 누구도 부인하기 어려운 국제질서의 본질이다. 우리나라가 김영삼 정부 말기에 외환위기를 맞아서 국제통화기금(IMF)의 구제금융을 받게 된 때에도, 일본 정부는 강자의 지위를 최대한 이용해 독도 문제 등에 관한 유리한 입지를 확보하기 위해 한일어업협정의 재협상을 요구했다. 일본으로부터 외화를 빌려서 외환위기를 극복해야 했던 김대중 정부는 1998년 독도를 공동수역에 포함시키고 대화퇴(大和堆) 어장을 일본과 공동 어로구역으로 인정하는 제2차 한일어업협정을 체결하게 된다.
최근 일본이 취한 반도체 관련 수출 규제는 통화 스와핑이나 어업협정과 다른, 일본의 대(對)한국 전략을 내포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일본의 수출 규제는 한국이 일본에 버금가는 기술을 확보하는 것을 방관하지 않겠다는 기술패권 전쟁의 성격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트럼프가 중국의 기술굴기를 막기 위해서 화웨이 제품의 구입·사용을 금지하고 화웨이에 대한 기술과 칩 제공도 금지한 것처럼, 아베는 삼성의 비메모리 반도체 시장 진출과 현대차의 차세대 자동차 기술 개발을 틀어막기 위한 전략을 추구하고 있다. 아베의 전략은 곧 있을 참의원 선거에도 도움이 되고 트럼프의 미국우선주의에도 부합하기 때문에 이미 트럼프의 동의를 받았을 것이라는 추측도 있다.
일본은 1980년대 중반 소니의 전자제품이 전 세계 시장을 지배하면서 미국에 버금가는 제2의 강대국으로 부상했지만, 1985년 미국 등 선진국들과의 플라자합의에 따라서 엔화 가치를 절상하는 환율 조정을 하면서 성장률이 크게 떨어지고 부동산 거품이 꺼지면서 소위 잃어버린 20년을 맞게 된다. 우리 정부가 남북경협만을 이야기하고 한미동맹은 도외시하는 가운데 미국 및 일본으로부터 고립되고 경제보복의 피해가 지속된다면, 대한민국의 성장엔진도 멈춰 버릴지 모른다.
일본의 공격은 시작되었다. 이제부터라도 우리는 지혜를 모아야 한다. 국제무역기구(WTO) 제소는 필요하겠지만, 승소를 기다리면서 첨단산업이 황폐화되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는 없다. 반도체 소재 및 장비 국산화도 당연히 추진해야 하겠지만, 당장 공장을 멈추고 국산화만 기다리고 있을 수도 없다. 경제적 차원뿐만 아니라 정치·외교·군사적 측면을 모두 고려한 효율적 대응책을 찾아야 한다. 좌파, 우파 따지지 말고 전문가들의 아이디어와 지혜를 존중해야 할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