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에 발목잡힌 韓 반도체-디스플레이, 외딴섬 갇히나

입력 2019-07-10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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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과 일본 정부가 반도체 소재에 대한 수출규제로 갈등이 격화한 가운데 양국 기업들이 대책 마련을 위해 분주히 움직이고 있다. 게티이미지
“일본의 무역 제재가 장기화하고, 미국의 침묵이 길어진다면 결국 우리나라 기업들만 ‘외딴섬’에 갇히게 될 것입니다.”

대기업 고위 임원은 일본의 우리나라에 대한 반도체·디스플레이 핵심 소재 수출 제재를 만만히 보면 안 된다며 이같이 토로했다.

세계 1위인 우리나라 반도체·디스플레이 기업이 멈추면 미국과 일본 기업 역시 피해를 입는 탓에 일본의 무역제재가 극단으로 치닫지는 않을 것이란 낙관론에 대한 반론이다.

10일 재계 및 관련 업계에 따르면 우리나라 기업의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공급이 끊겨도, 미국과 일본 IT 업계에 미칠 충격은 생각만큼 크지 않을 가능성이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국내 반도체·디스플레이 업체들이 점유율과 기술력에서 세계 선두권이지만, 대체재가 없지는 않기 때문이다. 대체가 불가능한 제품은 최상위급 정도다. 나머지는 자체 조달하거나 중국 기업으로부터 공급받을 수 있다. 최근 몇 년간 계속된 메모리 반도체 호황으로 쌓인 재고도 많다.

이병태 카이스트 교수는 “최첨단 반도체 제품은 우리나라만 생산할 수 있지만, 눈높이를 낮추면 미국 마이크론 등도 모두 생산한다”며 “게다가 경쟁사에는 지금이 기회이기 때문에 과감한 투자를 할 경우, 우리와의 격차가 줄어들 수 있다”고 우려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에 이어 메모리 반도체 3위 기업인 미국 마이크론의 주가가 최근 크게 오르고 있는 게 이 같은 분위기를 잘 보여준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전체 D램 시장의 70.4%, 낸드플래시 시장의 43.7%를 차지한다. 두 업체 공급이 끊기면 D램의 경우, 23% 점유율인 미국 마이크론에 수혜가 돌아간다. 낸드플래시 역시, 2위인 일본 도시바와 3·4위 미국 웨스턴디지털·마이크론으로 수요가 몰린다.

이종호 서울대 반도체공동연구 소장은 “일본의 규제는 우리나라 외 다른 메모리 반도체 업체들엔 호재일 수 있다”며 “규제가 장기화할 경우 세트업체들이 삼성전자, SK하이닉스 경쟁사인 미국의 마이크론 제품을 사용하는 경우가 생길 수 있다”고 말했다.

이처럼 자국의 피해는 적고 수혜도 보는 상황이라면 미국이 적극적으로 한일 무역 전쟁에 개입할 가능성도 낮아진다.

LG디스플레이가 100% 공급하는 TV용 OLED를 봐도 LG전자와 중국 업체들이 가장 큰 피해를 보는 구조다. OLED TV를 만드는 미국 기업은 없고, 일본 기업 중에는 소니와 파나소닉이 만들지만 비중은 크지 않다.

소니의 지난해 전체 영업이익에서 TV와 비디오 사운드 주변기기 등을 포함한 사업 부문의 영업이익 비중은 10%에 불과하다. 삼성디스플레이가 시장의 87%를 장악한 스마트폰용 OLED에서도 중국 BOE가 빠르게 추격 중이다.

결국 일본 정부가 계속 우리 목줄을 조이고 미국도 나서지 않은 상황이 이어진다면 우리 기업은 물론 대한민국 경제의 미래도 장담할 수 없게 된다.

이번 사태는 일제 강제 징용을 둘러싼 우리나라와 일본의 외교 문제로 시작된 까닭에 양국 정부 결단 없이는 해결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정치논리에 우리 기업이 발목을 잡힌 형국이다.

이병태 교수는 “이번 경제 무기화의 본질은 외교 문제라 대통령이 타협 의지를 보이지 않으면 해결책은 없다”며 정부의 조속한 대응책 마련을 촉구했다.

이용범 반도체선진화구조연구회 대표는 “일본의 전략전술에 말려 감정적 대응으로 추가 보복의 빌미를 주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된다”며 “‘화이트 국가’ 제외 등 추가 보복에 나설 경우 자동차·조선·화학 등 다른 핵심 산업도 타격이 불가피하다”고 지적했다.

한편 일본을 방문 중인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역시 일본 대형은행 관계자들을 만나 일본 정부가 단행한 한국에 대한 수출규제 강화 조치로 인해 한일 관계가 더 악화되는 상황을 걱정하고 있다고 밝힌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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