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광모 국내 현장점검…최태원 정부와 공조
일본의 수출 규제 조치 ‘직격탄’을 맞은 국내 기업들이 해결방법을 찾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다. 실무자는 물론 총수까지 직접 발 벗고 나서 정부, 일본 제조사, 국내 사업장을 찾으며 장고(長考)를 거듭하고 있다.
12일 재계에 따르면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귀국을 미루고 일본에서 예상보다 오래 머물며 소재 확보와 해법 모색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일본 현지 언론 등의 전망에 따라 이 부회장의 귀국날짜는 지난 11일로 예상됐었다. 그러나 이날도 이 부회장이 들어오지 않았다.
이 부회장은 일본 정부가 반도체 핵심 소재에 대한 수출 규제 강화 조치를 하자 지난 7일 일본으로 떠났다. 10일 열린 문재인 대통령과 30대 그룹 총수의 간담회에도 양해를 구하고 불참했다. 그만큼 해결방안 찾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 부회장은 일본 재계 및 은행 관계자 등을 만나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한편 제조사 관계자도 만나 해결책을 모색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일본 정부에 영향을 미치고 말을 전달해줄 수 있는 재계 및 은행 고위 관계자들을 만나 삼성전자의 의견을 전달했을 것이라는 관측이 제기된다.
또 한편으로는 소재 조달이 매우 긴급한 상황인 만큼 소재 제조사 또는 해당 회사의 대주주 경영진과 만나 제3국을 통한 우회 수출 가능성 등을 논의했을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다양한 추측과 전망이 혼재될 정도로 이 부회장의 일본 내 움직임은 베일에 싸여 있다. 일본 현지 언론들도 관계자의 말을 인용한 전망과 추측에 의존하고 있다. 한·일 정부와 국내외 여론이 민감하게 흘러가고 있는 상황에서 이 부회장이 만나는 인사, 말 한마디에 실리는 무게감이 다르기 때문에 극도로 조심스럽게 움직이는 것으로 보인다. 삼성전자는 이 부회장의 일정에 대해 말을 아끼고 있다.
일본 민영방송 TV아사히는 이 부회장이 일본 대형은행(메가뱅크) 관계자 등과 만난 자리에서 한·일 관계가 더 악화할 수 있다는 것을 우려하고 있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이 부회장의 발언은 일본 정부의 수출 규제가 장기화할 경우 양국 기업들이 동시에 피해를 보는 악순환에 빠져들 수 있음을 우려한 것으로 풀이된다.
구광모 LG그룹 회장도 국내 현장을 점검하며 대응 모색에 나섰다. 구 회장은 11일 경기도 평택에 있는 LG전자 소재ㆍ생산기술원을 방문해 홍순국 LG전자 소재ㆍ생산기술원장 등과 회의를 하고 그룹 내 소재 개발 상황을 점검했다.
구 회장이 LG전자 소재ㆍ생산기술원을 방문한 데는 소재 산업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평소 철학이 반영된 것이라고 업계는 보고 있다. 구 회장은 10일 청와대에서 문재인 대통령을 만난 자리에서 “한국 주력 산업이 글로벌 시장에서 경쟁력을 갖추려면 이를 뒷받침해주는 소재 부품 장비 등 국내 기초 산업이 탄탄해져야 한다”고 말한 바 있다.
일각에서는 일본 정부의 소재 수출 규제 여파가 작용한 것이라는 해석도 나온다. 그룹 계열사인 LG디스플레이는 현재 일본 규제 품목에 해당하는 고순도 불화수소(에칭가스) 조달 방안을 마련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강인병 LG디스플레이 CTO(최고기술책임자) 부사장은 9일 한국공학한림원이 서울 종로구 포시즌스 호텔에서 주최한 산업미래전략포럼에서 “에칭가스와 관련해 국산화는 물론 중국과 대만 등 대체재를 찾아 활용하기 위해 고민 중이다”고 설명했다.
다만, LG그룹 관계자는 “구 회장의 소재ㆍ생산기술원 방문은 이전부터 계획된 것”이라며 “최근 일어난 일본 수출 규제와 관련해 긴급히 일정을 잡은 것은 아니다”라고 설명했다.
최태원 SK그룹 회장은 정부와 공조하며 해결책을 찾고 있다. 최 회장은 지난 7일 홍남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과 김상조 청와대 정책실장과 만나 일본 수출 규제 대책을 논의했다. 이어 10일 문재인 대통령과 재계 총수 간담회에 참석했다. 이석희 SK하이닉스 사장 등 SK하이닉스 임원과 실무자들도 물밑에서 분주하게 대응책을 모색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SK하이닉스 관계자는 “지켜볼 수 많은 없는 상황”이라며 “구매 담당자들이 움직이고, 마케팅을 통해 고객사에 레터를 보내고 있다”고 말했다.
특히 SK하이닉스는 일본산 비중이 80~90%를 차지하는 에칭가스 확보에 사활을 걸고 있다. 에칭가스 재고수준은 약 1달. 극단적으로 재고가 다 소진됐음에도 일본이 수출 심사를 길게 하거나 불허하면, 당장 에칭가스 재고가 없어지게 된다. 중국에서 원료를 가져와 에칭가스를 생산하는 방법, 국내 업체에 맡기는 방법 등을 검토하고 있지만, 생산량과 품질을 충족시킬 수 있을지 미지수다.
재계 관계자는 “일본이 수출 규제한 소재는 단기와 장기적으로 또 경중으로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각각의 공정에서 중요한 품목들”이라며 “일본 대체 소재를 구하더라 기존과 비슷한 생산량과 품질이 담보되어야 한다. 생산시설 증설, 품질향상에 또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이번에 직격탄을 맞은 기업들은 그야말로 시간과 싸움을 하는 것”이라고 분위기를 전했다.